2008년 11월 1일 토요일

2008년 10월 8일 수요일

대화의 기술

"여자들은 말이 많아!", "남자들은 확실히 둔해~~"
라고 말을 할 때 여기에는 "일반적으로," "평균적으로," "대부분의 경우에는" 등의 부사구를 생략하고 말을 한다고 알아 들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대응한다.
"에이~~ 그야 사람 나름이죠!" "어? 여자보다 말 많은 남자들도 많던데요...?"
소위 딴지 걸기 또는 말꼬리 물고 늘어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평균적으로" 또는 "많은 경우에" 등을 붙이지 않았다고 시비 거는 꼴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순발력이 뛰어나다," "예리하다"는 등 자부심을 갖고 있는듯 하다.

이런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그 후 몇 번 티격 태격 말이 오가다가는
"당신이 먼저 그런 투로 말했잖아~~" "왜 반말이야~~?"
등등으로 대화의 주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다툼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전형적인 "딴지걸기" 또는 "말꼬리 붙잡기" 선수들과 대화할 때 겪는 과정이다.

그렇다. 우리가 말을 할 때 비록 "~~~하다."라고 단정적으로 말을 하더라도 거기에는 "일반적으로," "많은 경우에," "대부분" 등의 부사구를 생략하고 있다는 것으로 알아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을 정말 피곤하게 만들고,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이런 "딴지걸기" 선수(?)들의 그런 공격(?)을 피하기 위해 조심을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 여기 부처세상 게시판에 글을 쓸 때는 매번 "많은 경우에," "대부분의 경우에," "일반적으로" 등 쓸데없는(?) 부사구를 앞에다 붙이는 몹쓸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 글 또는 말이 어색하게 된다. (버릇대로 하자면 "어색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등)

좋은 대화를, 좋은 소통을 하려면 이런 말꼬리 물고 늘어지기 버릇을 빨리 고쳐야 한다. 대화의 주제에 집중하고, 비록 "~~다."라고 단정적으로 말을 해도 "대충" "대게"를 빼고 말하는구나 라고 알아듣는 연습을 하면 된다.

대화할 때 주의할 점 하나 더...
"결코," "항상," "언제나," "맨날," "절대," ... 등의 강한 부사들은 가능하면 쓰지 않을 것.

그리고 "정말로 말인데..." "솔직히 말해서..." "이건 진짠데..." 등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 그런 부사구는 쓰면 쓸수록 손해이다. 평소에는 솔직하지 못하고 거짓말만 해 왔다는 것으로 오해 받을 소지가 있으니까.

아무튼 매끄러운 대화를 하는 데도 약간의 기술과 훈련이 필요한 듯 하다.

이상 도신의 횡설수설입니다.
_()_()_()_

2008년 10월 5일 일요일

모순

우리가 어디서 좋은 글을 보고는 불동 법우들에게도 보여 주고 싶을 때는 "퍼오기"를 합니다. 그 "퍼오기"란 같은 글을 복사를 해서 여기 불동 게시판에 붙여 놓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같은 글이 양쪽 서버에 저장이 됩니다. 결국 많이 읽히는 어떤 글들은 수없이 많은 복사본들이 여러 컴퓨터 서버들에 저장이 되어 있겟지요.

그런데 그렇게 "퍼오기"를 하지 않고 지난번 제가 소개했던 "모셔가기"를 하면 그렇게 많은 복사본들이 여러 컴퓨터에 중복되게 저장이 되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마우스를 한번 더 클릭하게 하는 부담을 주긴 하지만, 그게 그렇게 큰 부담은 아니겠죠.)

아마도 이런 식으로 낭비되는 서버 컴퓨터의 용량을 따져 보면 엄청날 겁니다. 많이 읽히는 글이 몇 번이나 복사에 복사를 거쳐 갔을까를 상상해 보면 되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왜 그렇게 "퍼오기"를 할 수 밖에 없는가? 바로 우리 나라 포탈들의 폐쇄정책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다음에 있는 어느 카페의 글을 불동 식구들에게도 읽게 히고 싶다면... 저는 양쪽을 들락거릴 수가 있어야 합니다. 즉, 양쪽 열쇠를 다 갖고 있어야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퍼오기"를 잘 하려면 카페, 클럽 등 "폐쇄 동호회"에 많은 열쇠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인터넷의 공개된 게시판에 글을 올릴 때는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 글을 읽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만일 몇 사람들 하고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전자우편, 쪽지, 메모, 메신저, 등의 기능을 사용하면 되니까요.

어떤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원한다면 그 글에 쉽게 접근이 가능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우리나라 카페, 클럽 등의 글들은 열쇠를 가져야만 읽기조차 허용을 합니다.

이런 경우, "모셔가기"는 할 수가 없고, 하는 수 없이 "퍼오기"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게 바로 모순입니다. 많이 읽히기를 원하면서 잘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꼭꼭 걸어 잠그는 모순...

또한 인터넷 공개 게시판에 글을 올릴 때는 많은 사람들이 읽기 바라는 마음일 텐데 그 글을 퍼 가면 "저작권" 침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우습기 짝이 없는 모순...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글읽기가 가능하도록 하면 그 글이 외부로 "퍼가기"를 막을 수가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사실은 어리석은) 생각...

이런 것들이 바로 다음, 네이버, 파란, 등 우리나라 포털 사이트들의 폐쇄정책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거의 세계 1위 수준의 인터넷 사용인구를 갖고 있으면서도 야후나 구글에 밀리는 이유입니다.

얼마 전 몇몇 문제로 약간의 갈등이 있었을 때, 불동의 아름답지 못한 면을 외부로 노출시키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생각 때문에 게시판을 다시 "폐쇄형"으로 바꿔야 되지 않느냐는 의견이 있었던 것을 얼핏 본 것 같은데...

아마도 그건 옳바른 방향이 아닐 겁니다. 우리 불동이 지금 택하고 있는 "개방형" 게시판 정책은 아마도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아주 훌륭한 시스템일 겁니다. 게다가 회원이 아닌 사람에게도 "글쓰기"까지 허용하는 "난장판"이라는 게시판을 갖고 있다는 것은 너무너무 훌륭합니다.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게시판 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어째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은데... 우리가 신세지고 있는 (공짜로 셋방살이 하고 있는) "파란"의 컴퓨터 용량 절약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싶으시면 "퍼오기"보다는 가능하면 "모셔가기"를 자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자원절약"이고 "환경운동"입니다.

도신 두 손 모음 _()_()_()_

2008년 10월 4일 토요일

망가지는 우리 말과 글

님의 침묵 - 한용운 -
<님아 잠수? - 용우니^^*- >


님은 갔습니다
<님아 가써염.>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헐~~~ ♡하는 니마가 가써염.>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퍼시시한 산빛 쌩까고 단풍나무 숲을 향해>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난 당근 지름길루 걸어서 씨버버리고 가써염.>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빤짝 꽃가치 때꽁하고 빛나던 옛 맹세넌>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절라 차가운 구라가 되가지구 한숨의 미풍에 20000해써염.>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날카론 첫 뻐뻐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내 팔자 도움말 캡숑 바꺼넣코>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뒷달리기로 텨 텨 텨 버려써여.>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지는여 냄새 쌈빡한 니마의 말빨에 뻑가구>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꽃가튼 니마의 얼굴땜시 ㅡ///ㅡ☜ 이랬져>

(중략)
<(잠쉬)>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벙개때 찌져지는걸 시러하는거처럼>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찌져질때 다시 벙개칠걸 미더염>

아아 님은 갔지만는
<흐미~~ 니마는 빠이해찌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지는 니마를 열라 잡거 이써여.>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내 소리 카바 못하넌 러부송은>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니마의 잠수에 다굴 포즈로 도네염.>

2008년 10월 3일 금요일

2008년 9월 20일 토요일

의사소통의 기술

우리가 살면서 서로 의사소통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 의사소통을 하는 수단은 주로 말 또는 글이지요. 언어의 메시지 전달력의 한계는 분명히 있겠지만 그걸 알고서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말이나 글이 거의 유일한 수단일 것입니다. 물론 "염화시중의 미소" 같은 것으로 화답을 하거나, 무슨 암호문 같은 "선문답"으로 멋있는 대화를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내가 말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또는 남의 말을 들을 때 (글을 읽을 때) 약간의 기술이 필요하고, 그 기술을 습득하는데도 약간의 훈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흔히 "남의 말을 잘 듣기" 보다는 내가 "말을 잘 하기"가 훨씬 어렵다고들 생각하기 쉬운데... 제가 보기에는 거꾸로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글을 쓸 때와 남의 글을 읽을 때 조심할 점들 또는 실수하기 쉬운점들을 몇가지 생각해 봤습니다.

글을 쓸 때 조심할 점들...

- 내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히 전달되도록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노력할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표현 방법이나 어휘 선택에 상당히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 비아냥거리는 말투, 과격한 말투, 애매한 표현, 욕설 등은 절대 금물. 특히 빈정거리는 말투가 습관화 된 사람들이 흔히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버릇이기 때문에 많은 노력을 해야 고쳐질 것입니다. (물론 일부러 남의 속을 뒤집어 놓으려고 작심하고 덤비는 경우에는 의도를 갖고 하는 짓이라 막을 도리가 없겠지요. 그런 사람들은 원래 질적으로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냥 쓰레기처럼 취급을 해 버리고 한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리는 것이 최상책입니다.)

- 공개된 게시판에서 글을 쓸 때는 가능하면 지나치게 감정적인 표현이나 낱말은 자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칫 글이 무미건조하여 생명력을 잃기 쉽지만 말썽을 일으킬 소지가 줄어 듭니다. 결국 적절한 조화가 필요할 듯... (물론, 글의 목적이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나 문학적인 글인 경우는 예외이겠지만...)

- 말을 할 때는 뱉어 내고 나면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지만, 글을 쓸 때는 읽어 보고 또 읽어 보고 한 다음에 글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그런 버릇을 들인다. (그런데 제 경우에는 오프 라인에서 글을 다 쓴 다음 올리려고 하면 마치 허공에다 말하는 것 같아서 글도 잘 안 쓰여질 뿐 아니라 글이 딱딱하고 무미건조해지더군요. 그래서 저는 이 방법을 잘 안 씁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때 주의할 점들... (제대로 읽기가 쓰기보다 훨씬 어려운 듯...)

- 게시판의 글읽기를 할 때 많은 경우 휘리릭~~ 읽어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 자칫 글쓴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글 속에 있는 몇몇 낱말이나 표현에 집착해서 그 글의 내용을 속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 바로 오해가 생기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본래의 논지와는 별 상관이 없는 소위 "말꼬투리" 잡고 늘어지기 언쟁(논쟁이 아니라)이 벌어지곤 하지요. 그렇게 하든 말든 결국 읽는 사람의 자유지만, 적어도 댓글을 달고자 할 때는 다시 꼼꼼히 읽어서 글쓴이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 노력을 하더라도 언어의 메시지 전달력의 한계에서 오는 오해는 피할 수가 없는데...

- 글을 비록 세심하게 읽는 경우 마저도 대부분 사람들은 그 글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또는 유리한) 말만 골라서 읽는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같은 글을 읽고도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해석들을 하고는 하지요. 그래서 글쓴이 또는 말하는이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매우 중요한 것이겠지요. 또 그래서 "말하기"보다 "말듣기"가 더 어려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 많은 경우 글 내용이 무엇인가보다 누가 쓴 글인가에 집착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꼭 같은 글이 조선일보에 실렸을 때와 한겨레에 실렸을 때 다르게 판단하는 오류들을 많이 범합니다. 말하자면 글을 읽기 전에 미리 선입견(편견)을 갖고 글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읽는이가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 또는 평소에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 (소위 코드가 맞는 사람)이 쓴 글에서는 내 생각을 굳히는 부분을 열심히 찾게 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흠 잡을 부분을 열심히 찾게 되지요. 결국 얻을 것은 하나도 얻지 못하고 자기 생각이 옳다는 집착만 더 강해질 수 밖에.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로 바보 같은 짓입니다. 자기가 냉철하고 지혜롭게 판단해야 할 일을 남한테 맡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결국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 모여서 어울리고, 편가르기가 되고, ... 일종의 집단 자위행위를 하는 꼴이 되는 것이니요.

그래서 학술 논문을 심사하고 평가할 때는 대부분의 경우 글쓴이의 이름을 드러나지 않게 하고서 평가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블라인드 시스템으로 평가를 하는데도 많은 경우 필자의 논지나 문체 또는 인용문헌 등으로 미루어 필자를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상 "글 쓰기" 및 "글 읽기" 기술(?) 몇 가지를 생각나는데로 적어 봤습니다.

최근 우리 부처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들이 혹시나 본질적인 문제, 아주 중요한 문제, 또는 아주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서 견해가 달라 생기는 문제들이 아니라 바로 "의사소통 기술"의 미숙함에서 오는 문제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다들 부처세상을 너무도 사랑하는 마음들을 갖고 있는 것 같고, 다들 부처세상을 위해 너무 열심히들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다만, 그 사랑하는 방법들이 약간씩 (많이도 아니고 정말로 약간씩) 다를 뿐이고, 거기다가 의사소통의 미숙에서 오는 약간의 (정말로 약간의) 오해에서 밪어진 "약간의" 갈등 같은데... 그것이 어쩌다 보니 심각한 문제처럼 부풀려서 보이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성장과 발전을 위한 진통 정도 ...? 이건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요?

이상 도신의 횡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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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본 불경 악영향의 심각성

얼마 전에는 뜻도 잘 모르고 웅얼웅얼 외우는 한문본 경전 독송 소리를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라고 했다가 불동을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만들어 놓았는데... 또 그놈의 "귀신 씨나락..." 시리즈가 계속되느냐고 짜증 부리시는 분들 아마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지난 "귀신 씨나락..." 논쟁 때 잠깐 이야기 했던 것 처럼 불교는 원래 인도에서 탄생한 종교입니다. 따라서 불교 경전도 당연히 인도말인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범어)로 기록되었었지요. 다만 우리나라 불교가 중국을 거쳐서 들어오다 보니 자연히 한문본 경전과 같이 들어오게 되었죠.

그런데 팔리어나 범어는 아시다시피 우리 말처럼 소리글자를 씁니다. 중국어는 뜻글자인 한자를 쓰구요. 따라서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을 할 때 적절한 중국어 낱말을 찾지 못하면 자연스레 음사(음역)를 해서 그 소리가 비슷하게 되도록 한자로 표기한 것이지요. 예를 들면 "마하," "반야," 바라밀다"... 등등. 마치 우리가 텔레비전, 라디오, .. 등으로 번역(?)을 하는 것처럼...

따라서 한문본 경전에는 그 뜻을 한자말로 바꿔 놓은 낱말들과 단지 소리만 비슷하게 음사한 낱말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 중국사람들은 고유명사들도 뜻풀이를 해서 이름을 새로 지어준 경우도 아주 많습니다. 예를 들면, 나가르주나 ==> 용수, 아상가 ==> 무착, ..등) 그런데 한문도 잘 모르고 인도말도 잘 모르는 우리 한국 사람들이 그것들을 쉽게 구별해 내기는 정말 어렵겠지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공부를 많이 한 스님들께 또는 학자들께 배우는 수 밖에 달리 길이 없습니다.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 (불법)"을 배우고 실천해서 "부처"가 되고자 하는 종교이지요.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이 뭔지도 모르면서 실천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요?

그런데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정말 심각한 문제는...
한문본 경전의 성격이 이렇다 보니 스님들도 자주 헸갈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도말은 잘 모르고 한문은 꽤나 하는 스님의 경우, 음사된 낱말을 한자 뜻 풀이를 하여 억지춘향격으로 뜻을 꿰어 맞추려고 하는 실수를 한다는 것입니다. 음사한 낱말인 경우, 단지 소리만 흉내낸 것이기 때문에 뜻이 안 통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그것을 억지로 뜻을 꿰어 맞추려고 하다 보니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서 소설을 쓰듯이 구라(어? 이거 일본말 같은데...?)를 풀게 되고... 그냥 모른다고 하거나 아님 가만히 있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일은 없을텐데... 아는 체 하는 바람에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해서 가르치게 되고, 무식한 우리는 또 그것을 부처님의 가르침인줄로 배우게 되고...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잘 못 전달되는 것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하지 않을 수 있나요?

지나친 걱정인가요? 얼마 전에 본 아주 유명한 선사 스님의 법문에서 읽은 일이 있는 겁니다. 보살의 뜻을 풀이하는데 "보"자의 뜻은 어쩌고 저쩌고... "살"의 의미는 어쩌고 저쩌고... 그래서 "보살"이란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풀이 해 놓은 걸 봤습니다. 기가 찰 노릇이지요. 보디삿트바 (범어) 또는 보디삿타 (팔리어) ==> 보리살타 (한자어) ==> 줄여서 "보살" 이렇게 된 것을 모르면 실수를 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남에게 자신있게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요? 불법이 왜곡되는데...? 저는 그런 해석은 주저하지 않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특히 선불교에서는) "알음알이"를 쓸데 없는 짓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중요하고도 의미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알음알이", 문자, 또는 언어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그것들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지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더 낫다라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행하는 것, 머리로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불법)을 배우고 행해서 부처가 되고자 하는 종교임에 분명합니다. 달마 스님은 부처님의 훌륭한 제자이고 큰 스승일 뿐이지 불교의 교조가 아닙니다. 혜능 스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신 두 손 모음 _()_()_()_

2008년 9월 7일 일요일

벌초

벌초...

전통이나 관습 vs 효율성

충돌... 갈등...

2008년 8월 30일 토요일

문화경제학

결국 7명 이 남아서...
폐강입니다.

노력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2008년 8월 29일 금요일

2008년 8월 28일 목요일

문화 경제학...

이번 학기 문화 경제학...

초기 수강신청자 38명이었다.

첫 시간에 나의 주문 사항은 ...

1. 영어로 된 글 읽기 연습을 주로 할 것이다.
2.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일주일에 10시간 이상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결과...

12명 남았다...
아마도 내일이면 더 줄어서 폐강이 될 전망.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경제학 원론 첫 시간부터 줄곧 가르쳐 온 것이
"There is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 (세상에 공짜란 없다)"
이었는데...

2008년 8월 23일 토요일

점심





오랜만에 식구들과 외식. 왕 비싼 산토리니...


2008년 8월 21일 목요일

2008년 8월 20일 수요일

경제성장과 인간다운 삶

경제 성장과 인간다운 삶

정기문 (강원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가끔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라는 질문을 하면 흔히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여기서 ‘잘 먹고 잘 산다’라는 말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해 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면 물질적인 풍요는 어떻게 얻어지는가? 이는 소위 활발한 생산 활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자동차를 더 많이 만들고, 집을 더 많이 짓고, 철도를 더 건설하고, 식량을 더 많이 생산하고, ... 등등. 그럴 때 우리는 이 사회에 새로운 것들이 더 많이 생산되었다고 하고, 그 결과를 경제 성장이라고 부른다.

어떤 물건을 “생산”한다고 할 때 우리는 새로운 물건이 이 세상에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새로 만들었다는 물건들은 없던 물건을 새로 창조해 낸 것이 아니라 사실은 기왕에 있던 물질들을 위치와 모양을 바꿔서 재조합 또는 재결합한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생산한다고 하는 경우를 보자. 과연 이 세상에 없던 새로운 자동차가 생겨난 것인가? 자동차를 만든다는 것은 이미 지구상에 있는 어떤 물질들을 모양이나 위치를 바꿔서 그 상태를 바꾸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동차를 생산하는 것과 이 테이블에 있는 사과를 잘라서 저 테이블로 옮겨 놓은 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이러한 물질과 에너지의 변환은 옛날 상태를 파괴하고 새로운 상태를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따라서 생산은 항상 동시에 파괴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없다가 새로 생겨난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새로 생겨나는 것도 없어지는 것도 없고 (불생불멸),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없으며 (불구부정), 늘어나는 것도 줄어드는 것도 없다는 것을 (부증불감)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또한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제행무상)?

그런데 경제학에서는 이러한 생산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고 믿는다. 그래서 생산은 곧 가치의 창조이고, 따라서 생산이 많아질수록 경제가 성장하고 발전한다고 정의한다. 경제가 성장한다는 말은 더 많은 물건을 생산한다는 말과 같은 말로 쓰인다. 이렇게 생산된 것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치를 더해 준다고 해서 “부가가치(value-added)”라고 부르고 이 부가가치를 모두 합하여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이라는 지표를 만들어 한 나라의 경제적 수준을 나타내는 척도로 삼는다.

물건들의 생산이 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고 믿는가? 이는 인간이 물질의 상태를 인위적으로 조작한 결과, 파괴된 상태의 가치보다는 새로 배열된 상태의 가치가 더 크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 활동이 정당화되려면 그 생산을 위해서 반드시 수반되는 파괴된 것의 가치보다 새로 재조합된 것의 가치가 더 커야만 할 것이다. 만일 파괴된 상태의 가치가 새로 생산된 상태의 가치보다 더 크다면 그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훨씬 더 가치있는 행위일 것이다.

예를 들어 골프장을 건설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골프장을 만들면 반드시 자연환경의 파괴가 뒤따른다. 만일 파괴된 자연환경의 가치가 골프장의 가치보다 더 크다면 그 생산 활동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행위이다. 그런데 문제는 생산된 골프장의 가치는 쉽게 시장가격으로 평가가 되지만, 파괴된 자연환경의 가치는 시장에서 쉽게 평가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경제학에서는 파괴된 환경의 가치가 단지 시장에서 쉽게 평가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잊어버리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또 어떤 경우는 생산 그 자체가 파괴를 위한 생산인 경우도 있다. 무기의 생산은 그 목적 자체가 파괴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파괴를 위한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훨씬 더 많은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생산을 하지 않는 것이 생산을 하는 경우보다 그 가치가 클 경우는 흔히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골프장이 건설되고 무기나 마약 등이 많이 생산되면 국내총생산은 증가하고 따라서 경제는 성장하는 것으로만 인식한다.

생산 활동의 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결국 그 생산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파괴된 것의 가치를 충분히 고려해야만 한다. 어떤 경우는 생산 활동에는 적게 참여하지만 소비를 적게 하여 파괴를 적게 함으로써 인류 복지에 훨씬 더 크게 기여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우리 생각에 의하면 보다 많은 생산--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파괴--은 더 많은 가치를 생성하고, 이는 궁극적으로 소비활동을 통하여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 인간의 행복에 기여한다고 믿으며, 그러한 생산 활동만이 경제를 성장하고 발전시킨다고 보는 것이다.

서양사상과 동양사상의 중요한 차이 중의 하나는 서양에서는 많은 것을 직선적 또는 단일 방향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동양에서는 많은 경우 순환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서양에서는 시간이 한쪽 방향으로만 계속해서 흐른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동양에서는 시간이 일정 주기로 순환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서양에서는 인류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발전이라는 것은 주로 경제의 성장 또는 “물질적 풍요로움의 확대”로 정의된다. 그래서 경제 성장이라는 것은 대부분 좋은 것으로 생각된다. (부자, 큰 기업, 부유하고 강한 나라, ... )

그러나 경제를 하나의 순환체계로 보면, 큰 경제 또는 빨리 성장하는 경제보다는 순환이 원활한 “건강한 경제”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키가 크고 몸이 비대한 사람이 반드시 더 건강한 것이 아니고, 근육질이 지나치게 발달한 보디빌더들의 수명이 더 길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경제를 이처럼 성장하는 어떤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순환체계로 인식하게 되면 빨리 성장하는 경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순환이 원활한 “건강한 경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끝없는 인간의 욕망과 이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물질적 자원의 제한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소위 생산과 소비를 통해서 인간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켜 나가려고 노력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적 욕구 자체를 줄여 나가거나 궁극적으로는 그런 욕망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방법일 것이다. 과연 어떤 방법이 효과적이고 실현가능한 것일까?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대부분 감각적 쾌락이나 물질적 욕망의 충족을 통해서 행복이 얻어진다고 믿는다.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더 좋은 집에서 살고, ... 이런 종류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경제활동-생산, 소비, 거래 등-을 한다. 행복 이라는 것은 활발한 경제활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을 충족하려고 함으로써가 아니라 이에 대한 집착을 버려서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던가.

부처님께서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바로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이 갈애와 집착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무상(無常)이고, 고(苦)이며, 무아(無我)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우리가 이것을 깨닫게 되면 어떤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고, 결국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올바로 사물을 보게 되는 지혜를 얻게 되면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

(월간 불광)

2008년 8월 13일 수요일

있는 그대로 보기의 어려움

부처님께서는 사물을 볼 때 편견을 갖지 말고 항상 "있는 그대로" 보라고 가르치십니다. 얼마 전 착시현상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믿으려고 엄청난 노력을 해도 여러가지 주위의 장애물(?)들 때문에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때도, 다른 사람의 견해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겠지요.

최근 제가 물의(?)를 일으켰던 소위 일련의 "귀신 씨나락..." 시리즈 (원래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 어떻게 하다가 보니 3편까지 나오는 시리즈가 되었습니다)에 대한 반응들을 보면서, "아~~ 내가 하는 이야기는 조중동 찌라시에 실린 글 취급을 받는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꼭 같은 글이 "조중동에 실리면 쓰레기, 한겨레 또는 오마이뉴스에 실리면 옥고" 가 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바로 그 정반대가 되는가 봅니다. 바로 "있는 그대로" 읽고, 보고, 듣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겠지요.

이처럼 우리가 "있는 그대로" 보려고 엄청나게 노력을 해도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닐진데, 미리 편견을 갖고 보거나 읽으면 "있는 그대로"와는 거리가 한참 멀어질 것입니다. 하물며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또는 "한번 적이면 영원한 적"이란 기분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객관적" 이라는 말과는 아주 아주 거리가 멀어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가 자기 생각대로 이야기를 하고 또 살아 갑니다. 그러나 나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주고 받는 소위 소통의 기술이 필요할 겁니다. 그래야 발전이 있다고 봅니다.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 하고만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 갈등은 물론 없겠지만 맨날 그기서 그자리에 맴돌 뿐입니다. 그래서 칭찬이 욕보다 더 무섭다고 하는 건가 봅니다. 때로는 치열하다 싶을 정도의 논쟁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런 논쟁 중에 상대방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면 안 되겠지요. 물론 "빈정대는 말투"는 금물이구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인격에 관한 이야기는 가능하면 하지 말고, 논제 또는 이슈 자체에만 집중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좋은 논쟁에서는 "미움"도 "이쁨"도 금물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우리는 감정을 갖고 살아 가는 동물이니까... (토론의 기술을 배우고싶으신 분은 그 유명한 "밀린다왕문경"을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부처세상의 건전한 토론 문화를 위해서 다 같이 노력해 보심이 어떨런지요?

도신 두 손 모음 _()_()_()_

2008년 8월 9일 토요일

귀신 씨나락 ... 3

차한잔을마시며

귀신 씨나락 ... 3
정기문 08/08/09 17:36 | 조회수 0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는 말의 어감이 좋지 않아서 거부감이 많은 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쓰는 이유는 적절한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아서입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외우고 있는 한문본 반야심경을 "그 뜻도 모르고 단지 주문 외우듯 하는 것"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지금의 전통을 폄훼하거나 헐뜯자는 것, 절대 아닙니다.
저도 지금 한문본 반야심경 암송하고, 한문본 예불문 암송합니다. (그리고 사실 저는 아마도 한문을 상당히 잘 하는 편에 속할 겁니다)

물론 반야심경의 뜻을 잘 알고 암송하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그러나 한문으로 된 반야심경을 우리 말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왜 반야심경만 빼고 다른 경전은 전부 한글 번역본으로 읽을까요?
과연 한문본 반야심경 암송의 전통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삼귀의와 사홍서원이 한굴로 번역되어 노래로 불려질 때 얼마나 큰 반발이 있었나요?

또 다른 문제의 제기입니다.
지금까지 일으킨 문제로도 모자라서 또 문제를 일으키냐구요?
ㅎㅎㅎ 글쎄요...

우리가 자주 암송하는 천수경 신묘장구 대다라니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정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아닐까요?

신묘장구 대다라니는 원래 범어(산스크리트어)로 된 것을 한자로 음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 글자를 또 다시 우리 글자로 음역한 것이 지금 우리가 외우고 있는 천수 다라니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중국 글자는 여러가지 소리를 음사하는데는 매우 부족한 글자입니다. 특히 거의 모든 소리를 표현해 낼 수 우리 있는 한글에 비해서는 아주 형편없는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중국의 한문 글자가 한글보다 못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민 다양한 소리를 표현하기에는 ...) 범어 => 한자로 음역 => 다시 한글로 음역... 이러니 원래 소리와는 상당히 멀어진 소리가 되는 게 당영하겠죠?

다행히 최근에 훌륭한 신묘장구 대다라니가 우리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제 주장은 이 번역을 토대로 해서 더 잘 다듬고 운율을 맞추고 해서 암송용으로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어렵다면 차라리 범어 원음에 가까운 새로운 버전 (한글 버전?)으로 바꾸는 것이 더 합당할 듯... 물론 이것도 전통과 익숙함을 잃는 것입니다. 또 새로 외워야 하는 부담도 크구요... 그래도 잘못된, 또는 덜 비슷한 것을 계속해서 외우고 있는 것 보다는 그게 더 낫지 않을까요?

우리가 지금 암송하는 다라니

신묘장구대다라니 (神妙章句大陀羅尼)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 마하 사다바야 마하가로 니가야 옴 살바 바예수
다라나 가라야 다사명 나막 가리다바 이맘알야 바로기제
새바라 다바 니라간타 나막 하리나야 마발다 이사미
살발타 사다남 수반 아예염 살바 보다남 바바말아
미수다감 다냐타 옴 아로계 아로가 마지로가 지가란제
혜혜하례 마하모지 사다바 사마라 사마라 하리나야
구로구로 갈마 사다야 사다야 도로도로 미연제 마하미연제
다라다라 다린나례 새바라 자라자라 마라 미마라 아마라
몰제 예혜혜 로계 새바라 라아 미사미 나사야 나베
사미사미 나사야 모하자라 미사미 나사야 호로호로
마라호로 하례 바나마 나바 사라사라 시리시리 소로소로
못쟈못쟈 모다야 모다야 매다라야 니라간타 가마사 날사남
바라 하라나야 마낙사바하 싯다야 사바하 마하싯다야 사바하
싯다유예 새바라야 사바하 니라간타야 사바하 바라하
목카싱하 목카야 사바하 바나마 하따야 사바하 자가라
욕다야 사바하 상카 섭나네 모다나야 사바하 마하라 구타
다라야 사바하 바마사간타 니사시체다 가릿나 이나야 사바하
먀가라 잘마이바 사나야 사바하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사바하(3번)

원래의 다라니 (범어)

나모 라뜨나 - 뜨라야야 나마 아리야발로끼떼스바랴야 보디싸뜨바야 마하싸뜨바야
마하 -까루니까야 옴 싸르바-바예수 뜨라나-까라야 따스마이 나마쓰-끄리뜨바 이맘
아리야발로끼떼스바라 바시땅 닐라 - 깐타 나모 흐리다얌 아바르따이 씨야미
싸르바르타 싸다남 슈밤 아제얌 싸르바 - 부따남 바바 - 마르가 -비슛다깜 따드 야타
옴 알로께 알로까 - 마띠 로까띠끄란떼 헤 헤 하레 마하 -보디싸뜨바 쓰마라 쓰마라
흐리다얌 꾸르꾸르 까르망 싸다야 싸다야 두루 두루 비자얀떼 마하 비자얀떼
다라 다라 다렌드레스바라 짤라 짤라 말라 - 비말라 아말라-묵띠 에히 에히
로께스바라 라가 - 비샹 비나샤야 드웨샤- 비쌍 비나샤야 모하 - 비샹 비나샤야
훌루 훌루 말라 훌루 훌루 말라 훌루 훌루 하레 빠드마 - 나바 싸라 싸라 씨리 쓰루
쓰루 부디야 부디야 보다야 보다야 마이뜨레야 닐라 -깐타 까마씨야 다르샤남
쁘라흐라다야 - 마나흐 쓰바하 씻다야 쓰바하 마하 - 씻다야 쓰바하
씻다 - 요게스바라야 쓰바하 닐라 - 깐타야 쓰바하 바라하무카 씽하무카야 쓰바하
빠드마 - 하쓰따야 쓰바하 짜끄라 -육따야 쓰바하
샹카 - 샵다네 보다나야 쓰바하 마하 - 라꾸따 -다라야 쓰바하
바마 -쓰칸다 - 디샤 -쓰티따 끄리슈나 - 지나야 쓰바하
비야그라 - 짜르마 - 니바싸나야 쓰바하
나모 라뜨나 - 뜨라야야 나마 아리야발로끼떼스바라야 쓰바하
옴 씨디얀뚜 만뜨라 - 빠다야 쓰바하

한글해석 (전재성 번역)

삼보에 귀의 하나이다
옴- 큰자비심을 지닌 훌륭한 분으로, 모든 두려움에서 보호 하여 주시는
'세상을 굽어살피는 님' 거룩한 관세음보살님께 귀의 하나이다
목에 푸른 빛을 띄우신 님이시여
그에게 귀의 하옵나니,지순하여 겨룰수 없고 ,모든 뭇 삶들의 길을 청정으로 '이끄는'
'이 세상을 굽어살피시는 님' 관세음보살님의 가르침에로 제 마음을 돌이킵니다.
옴 - 아아,밝음이여! 빛과 같은 지혜를 지닌 님이시여! 세상을 뛰어넘은 님이시여!
님이시여! 위대한 보살님이시여! 당신은 마음을 살피고 또 살피시어
일을 하시고 또 하시고 이루고 또 이루시고, 펴시고 또 펴십시오.
승리하는 님이시여! 크낙하게 승리하는 님이시여! 호지 하십시오.호지하십시오
번갯불을 호지하는 님이시여! 움직이십시오, 움직이십시오.
티끌을 떠난 님이여! 청정한 해탈의 님이시여! 오십시오,오십시오.
세계를 '주재하는' 님이시여! 탐욕의 독을 업애게 하시고,
미움의 독을 업애게 하시고
어리석음의 독을 없애게 하십시오
님이시여! 훌루 훌루 말라 훌루 훌루 말라 훌루 훌루!
배꼽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님이시여! 싸라 싸라 씨리 씨리 쓰루 쓰루!
깨달으시고 깨달으셔서,깨닫고 또 깨닫게 하여 주십시오.
자비스러운,목에 푸른 빛을 띄운 님이시여! 애욕을 부숨을 기뻐하면서,쓰바하-
신비한 힘을 성취한 님을 위해서 쓰바하-,
위대한 신비의 오가를 성취한 님을 위해서 쓰바하-
'신비로운 힘의 방편을 지닌'요가 수행자님을 위해서 쓰바하-,
목에 푸른 빛을 띄운 님을 위해서 쓰바하
멧돼지 얼굴과 사자얼굴을 나투신 님을 위해서,쓰바하-
손에 연꽃을 든 님을 위해서, 쓰바하-
보륜을 사용하는 님을 위해서 쓰바하-
진리의 소라고동에서 소리가 울릴 때 우주적인 잠에서 깨어 난 님을 위해서 쓰바하-
큰 주장자를 든 님을 위해서, 쓰바하-
왼쪽 어깨쪽에 서 있는 위신력을 가진 승리자를 위해, 쓰바하-
호랑이 가죽을 두른 거룩한 이께, 쓰바하-
삼보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세상을 굽어살피시는 님'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합니다.
모든 것이 성취될지어다. 이 만뜨라를 위해서 쓰바하-

도신 두 손 모음 _()_()_()_

2008년 8월 8일 금요일

권위라는 환상

우리가 어떤 말의 내용이나 주장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려울 때면 대부분 그 말을 한 사람의 권위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다. 뭐 내가 곰곰히 생각해 봐야 어차피 판단하기 어려울 경우나 또는 곰곰히 생각해 보기가 귀찮으면 그 권위라는 것에 의존하면 편하니까 그 속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부처님께사는 이 점을 항상 경계하라고 가르치신다. 맹신은 백해무익일 뿐이다.

그러면 그 권위라는 것은 대체 어디서 오는가? 또는 그 권위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까

1. 언론 매체

보수주의자들은 조중동에 실린 글들은 무조건 믿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진보주의자들은 조중동에 실린 글들은 무조건 믿지 않고, 한겨레나 오마이뉴스의 기사면 무조건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결과는...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거나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면 너무도 뻔한 것들에 대해서도 거의 백팔십도 다른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이는 신념이나 이념과도 관계가 있다.

2. 이념, 신앙

기독교식 논리와 불교식 논리. 좌파적 주장과 우파적 주장. 이 부분은 "한 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 아무리 이야기하고 설득을 하려고 도무지 씨알이 먹혀 들지를 않는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성경책에 이렇게 씌였다라고 하면 불자들은 무조건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신념이나 이념은 아편보다 더 무섭다고 했던가?

3. 말하는 사람의 학벌, 지위, ... 등등

경제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이성모 원장님이 하면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시큰둥, 정기문이 하면 "음..." 하면서 고개를 끄떡끄떡. 꼭 같은 이야기를 유창희 거사가 하면 시큰둥, 조계사 주지 스님이 하면 "역시..." 하면서 합장.



4. 말하는 사람의 지명도


5. 용어

일반적으로 어려운 용어, 한자어, 영어, 외국어 등을 많이 섞어 쓰면 권위있는 걸로 착각한다.


6. 말하는 사람의 나와의 거리

이 부분이 참 재미있다. 우리 학교 전기공학과 교수가 겪은 에피소드 하나. 집에서 부인에게 전기에 관한 이야기를 어쩌다 하게 되었는데, ... 그 부인 왈 "여보, 텔레비전에서는 그렇게 얘기 안 하던데...?" 이 부인은 남편보다 그 텔레비전에 더 권위를 부여한 것이다. 자기 남편은 전기공학 박사인데도 말이다. 그 부인에게는 그가 전기공학 박사가 아니라 밤낮으로 시원찮은 남편일 뿐이다.

2008년 8월 7일 목요일

귀신 씨나락 ... 2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

이것도 내 귀에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린다. 아마도 연세 높으신 노보살님들은 아침 저녁으로 예불 드릴 때 부처님께 복을 비는 주문으로 알고 있는 건 아닌지? 불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무당들이 무슨 귀신 좇는 주문 쯤으로 생각하지는 않는지?

그나마 삼귀의와 사홍서원은 이제 우리 말로 번역을 해서 노래로 하니 아주 좋아졌다.

다른 경전들은 전부 우리 말로 번역을 해서 쓰면서 유독 아침 저녁으로 예불할 때마다 암송하는 예불문과 반야심경만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가끔 어떤 절에서는 반야심경을 우리 말로 번역해서 쓰는 곳도 있긴 하지만, 번역이 시원치 않아서인지 좀 어색한 듯하다. 특히나 암송용이라면 4-4조 또는 7-5조 등으로 운율이 맞아야 하는데 운율을 고려하지 않고 번역을 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우리 말로 잘 번역된 그리고 운율이 훌륭한 반야심경과 예불문을 노래로 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려 본다.

도신의 횡수였습니다.
_()_()_()_

2008년 8월 1일 금요일

불교적 경제생활

Monthly Magazine Buddha
2548 11 4337 2004

특 집 /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을까? - 불교와 경제/

불교적 경제생활이란 어떤 것인가?

정기문(강원대학교 경제무역학부 교수)

경제생활이란 경제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위한 우리들의 삶의 한 부분이다. 경제문제는 '무 한한 인간의 욕망에 비해 이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물질적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을 말한다. 물질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인간사회는 여러 가지 제도 를 만들고, 그 중에서도 특히 시장이라는 제도의 틀 안에서 소위 경제활동이라고 일컬어지 는 생산, 소비, 거래, 교환 등의 활동을 한다.

끝없는 인간의 욕망과 이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물질적 자원의 제한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소위 경제활동이라 는 것을 통해서 인간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켜 나가는 방법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물질적 욕구를 줄여 나가거나 궁극적으로는 그런 욕망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방법일 것이다. 과연 어떤 방법이 효과적이고 실현 가능한 것일까? 어떤 방식이 불교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불교적 경제생활이란 어떤 것일까?"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무소유'라는 낱말을 떠올리게 된다. 또한 불교적인 올바른 삶의 방식으로 흔히 '무소유'를 강조한다. 그런데 '무소유'의 삶이란 과연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살아간다는 의미인가? 이 를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극단적이고 실현이 불가능한 뜻으로 받 아들일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본질적으로는 소유할 수도 없고 소유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어떤 것을 소유한 다는 것은 무명으로부터 발생하는 우리의 관념의 산물일 뿐이다. 이 세상에 과연 '나' 또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있는가? 우리가 세상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때 '이것을 내가 가졌다'라고 착각할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착각이 바로 괴로움과 불행의 원인이 된다. 다시 말하면 어떤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은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한 수단이다.

≪중아함경≫에 의하면 "만약 옷을 축적하여 선법이 증대하고 악법이 쇠퇴한다면 나는 그 런 옷을 축적해도 좋다. 옷 뿐만이 아닌 음식, 도구, 주택, 촌락 등도 마찬가지다."라고 한다. 결국 무소유를 글자 그대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소 유를 통해서 욕망을 충족할 수가 있는가?' 또는 '과연 이 세상의 무엇이든 소유할 만한 가치 가 있는 것인가?'라는 말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또는 소유라는 것이 무명과 집착에서 비 롯된 망상의 결과라고 한다면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라는 말로 이 해되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이나 물질적 욕망의 충족을 통해서 행복이 얻어진다고 믿는다.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이런 종류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경제활동-생산, 소비, 거래 등-을 한다. 행복 이라는 것은 저 멀리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고, 이는 우리가 활발한 경제활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결국 채워질 수 없는 욕망 을 충족함으로써가 아니라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욕망의 노예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태국의 유명한 붓다다사 스님은 이 렇게 가르치신다. "어떤 것을 소유하거나 어떤 상태로 될 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는 깨달음 을 일으키는 기술이 있다. 그 기술은 사물들을 충분히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면 갈망이 있을 때는 무엇을 소유하거나 무엇이 되려고 하는 감정이 있다는 것과, 갈망이 완전히 사라져 사 물의 특징을 통찰할 때는 사물에 대한 태도가 다소 달라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간단한 예로 '먹기'를 살펴볼 수 있다. 맛있는 음식을 갈망하여 먹는 것은 정견에 따라서 먹는 것과 아주 다르다. 두 가지는 먹는 방법도 다르고, 먹는 동안의 감정도 다르며, 먹고 난 후 일어 난 감정도 다르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맛있는 음식에 대한 갈망이 없어도 역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부처님과 아라한들은 갈애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지만 여전 히 행위를 했으며 어떤 상태로 존재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욕망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보 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이룰 수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가. 행위의 결과로서 생기는 이것 혹은 저것으로 되고 싶은 욕망이나 갈애와 상반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특징에 대한 명확하고 철저한 지혜의 힘[正見]에 의 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우리는 욕망에 따라 동기를 부여받기 때문에 그 결 과 계속 고통의 지배를 당한다."

우리가 모든 종류의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욕망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는 것이 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무상(無常)이고, 고(苦)이며, 무아(無我)라는 것을 알 아야 한다. 진정으로 우리가 이것을 깨닫게 되면 어떤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고, 결국 욕망이 아니라 올바른 견해에 의해 지혜롭게 사물과 관계를 가지게 되며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말이다.

2008년 7월 31일 목요일

한국 불교의 문제

오늘날 우리나라 불교의 문제점으로 가장 많이 지적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기복 불교일 것이다. 이는 누구나 공감하고 흔히 얘기 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생락하고...

제가 보기에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심각한) 문제는...

우리나라 불교는 흔히 통불교라고 하지만 거의 선불교의 맥을 잇고 있다. 달마 스님으로부터 시작해서 6조 혜능을 거쳐 계승 발전된... 그래서 우리 불교 역사에도 유명한 선사들도 많고, 우리는 그분들을 존경하고 그 행적이나 어록들도 많이 접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선사들의 행적이나 어록들을 자주 접하다 보니 그 흉내들을 많이 낸다는 것이다. 선사들의 얽메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행동들을 흉내 낸답시고 괴상망측한 망나니 짓거리나 미친놈 같은 행동들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또 선문답 흉내를 낸답시고 무슨 말인지 알아먹지도 못하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또는 "문둥이 이 앓는 소리" 흉내들을 자주 낸다.

그런 괴상한 행동이나 알아 먹지 못할 듯한 소리를 하면 마치 한소식 한 사람처럼 보여질 것이라고 착가들을 하는 모양이다.

이 문제는 스님들도 그렇고 재가불자들도 마찬가지다. 선방에를 좀 다녔다는 스님들은 그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가끔 한마디씩 해야 폼이 난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재가불자들 중에도 참선을 좀 했거나 글줄 꽤나 읽은 사람들도 그런 흉내를 내야 멋있고 제대로 된 불자라고 착각들을 하는 모양이다.

사실 그런 스님들이나 불자들은 정말 깨뿔도 아니고, 그냥 살짝 맛이 간 사람들일 뿐이다. 그런 언행이 폼나고 멋있다고 착각하는 자아 도취자들...

경전을 잘 살펴 보라. (특히 부처님의 직접적인 육성이라고 할 수 있는 아함경을 보라) 부처님이 과연 그랬던가? 경전에 과연 그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들이 있는가?

이게 아마도 우리 불교에 깊이 스며 든 선불교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부처님의 올바른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우리나라 불교에서 그런 이상한 문화가 사라져야 할 것이다.
불교는 절대로 이상한 헛소리 하는 종교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불법)이 결코 어렵거나 이상한 세계관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다만... 실천하기가 어려울 뿐...

도신 두 손 모음 _()_()_()_

선문답 잘 하는 법 = 헛소리 잘 하는 법

  1. 무슨 소린지 모를 듯한 소리를 많이 지껄인다.
    (물론 자기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몰라야 한다)
  2.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한다.
  3. 비논리적인 말을 자주 한다.
  4. 아무에게나 반말을 찍찍~~ 해 댄다.
  5. 과격한 낱말을 자주 사용한다.
    (예: 똥물, 오줌, 자지, 보지, ...)
  6. 자신이 마치 한 소식 한 사람인 체 한다.
    (정말 깨달은 사람은 절대 티를 내지 않는 법...)
  7. 맛이 약간 간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한다.
  8. 자신의 기행(奇行)을 자주 자랑한다.

이렇게 하면 헛소리를 잘 할 수 있습니다.
실은 이런 사람 정신착란증 증세입니다.
정신병원에 가 봐야 하는데...

도신 두 손 모음 _()_()_()_

하느님 vs. 하느님의 말씁

기독교의 교리가 내게 거부감을 주는 이유는 ...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라고 하면 참 좋을텐데 하느님을 믿고 그 충직한 종(=노예)이 되라고 하기 때문인 것 같다.

하느님의 말씀은 거의 99퍼센트가 진리요 옳은 말씀이고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말씀들이다.

왜 100퍼센트가 아니고 99퍼센트냐 하면 천지 창조설 또는 몇가지 기적 같은 초자연 현상들 그리고 처녀 잉태설, 예수 부활설 등은 아직까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고 참이다 또는 거짓이다라고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다. 물론 그걸 믿는 사람들에겐 진리라고 생각 되겠지만 그건 맹목적인 믿음일 뿐이다. (이런 걸 우리는 신념이라고 한다)

그리고 위의 일들이 사실인지 아니면 꾸며진 이야기인지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 중요한 건 하느님의 말씀들이 옳은 말씀들이고, 우리 인간 세상에 도움이 되는 말씀들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하느님의 말슴을 믿고 따르며 숭배하라고 하면 될 것을 왜 그 말씀의 주체인 하느님을 믿고 따르며, 마치 주인을 따르는 종 같이 하라고 하는지...?

혹자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나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나 그게 그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겐 그렇지가 않다. 옳은 말씀이라면 그 말씀의 주체가 하느님이든 하나님이든 또는 개님이든 소님이든 믿고 행하는데 상관이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하느님을 자꾸 믿으라고 하니까, 그 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니 힘이 막강할 터이고 모든 것을 다 아시고 ... 그러니 잘 못하면 벌 받을까 봐 두려워서 힘 없는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믿고 따를 수 밖에... 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마치 조폭 두목에게 아무하는 기분...

"하느님"을 믿으라고 하지 말고, "좋은 진리의 이 말씀"을 믿고 따르라고 하면 안 될까? 그러면 아마도 적어도 신에게 아부한다는 기분은 들지 않을텐데... 그리고 신을 찬양하기 위해서 성가대를 만들어 훌륭한 음악을 바치고, 어마어마한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하고, 금촛대를 세우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성전을 짓고, 하느님 사업을 위해 전쟁을 하고, ... 이런 일들은 하지 않을 것 아닌가?

결국 차이는... "하느님의 말씀" = 감정과 인격이 없는 무생물의 좋은 진리의 말씀. "하느님" = 화도 내고 벌도 주고 상도 주는 감정이 있는 전지전능하신 살아 있는 생명체.

그런데 기독교 교리에서는 무생물을 숭베하고 믿으면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금기시 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기독교의) 하나님 이외의 신을 믿으면 그건 마귀의 아들...

나는 "옳은 진리의 말씀"이면 그것이 마귀의 말씀이든 개님의 말씀이든 상관 없이 믿고 따르라고 했으면 참 좋겠는데...

이상 도신의 횡수였습니다.

뱀발: God 이 "하느님"이 아니고 반드시 "하나님"이라야 한다고 우기는 개신교의 언어관도 문제...
하느님이나 하늘님이나 하나님이나 천주님이나...또는 알라님이나...

뱀발 2: 이 논리는 불교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의 제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것이지 부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불교 신자(信者)라는 말 보다는 불자 또는 불제자라는 낱말이 훨씬 좋습니다.

뱀발 3: religion 을 신앙(信仰)이 아니라 종교(宗敎)라고 번역한 것은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지만 절묘하고 탁월한 번역인 것 같습니다. 종교 = 주된 가르침. principal or main teaching. 캬~~~

욕보다 더 무서운...

다른 사람들이 나한테 욕을 하거나 빈정거릴 때, 그런 소리를 듣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넘기기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가끔 있기는 한가 봅니다. (가뭄에 콩 나듯이 ...) 그런 분들을 우리는 거의 군자, 또는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마도 만 명에 한 명쯤 있을까 말까...?

그런데 그런 분들 100명을 모아 놓고... 칭찬을 좀 해 줬더니... 100명 모두가 흔들리더랍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출 수 있게 만든다지요? 그래서 칭천을 바로 욕보다 더 무서운 바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정치권에서든 어디서든... 듣기에는 좋지 않은, 그러나 바른 말을 해 주는 사람은 다 멀리 하고... 듣기에 달콤한 말만 해 주는 사람들만 옆에 두려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인가 봅니다. 결국, 간신들만 살아 남고... 충신들은 쫓겨 나고...

지금 우리 이명박 대통령 옆에도 그런 칭찬 잘 하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닌지...? 요새 나라 사정이 너무 답답합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불교와 기독교

불교와 기독교는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우선 교주(교조)가 다르다. 기독교는 예수(=하느님 또는 하나님)를 믿는다. 그런데 예수는 엄청난 초능력을 갖고 있는 분이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또 바로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죽은 후 3일만에 다시 살아났다. 그러니까 지금도 죽지 않고 살아 계신다. 나이가 얼마나 되나? 2008 살? 엄청나다.

그리고 그는 첫 번째 생에서 엄청나게 많은 기적을 이루어 냈다. 물 위를 걸어 다니고, 병자를 고치고, 장님을 눈뜨게 하고, 앉음뱅이를 일어나게 만들고, 물고기 몇 마리와 떡 몇 조각으로 수천명을 먹여 살리고, ... (지금 북한 주민들이 굶어 죽어 가고 있는데, 이럴 때 예수님이 나타나서 좀 도와주면 좋으련만...)

그에 비해 불교의 교주가 된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는 어떤가? 그냥 평범하게 어머니와 아버지가 잠자리를 같이 해서 태어나셨다. 모든 인간들 또는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우리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그리고 부처가 되고 난 다음에도 그는 아무런 초능력적인 기적을 행하지도 않으셨다. 돌아가실 때도 병으로 돌아가셨다. 그것도 그 흔한 식중독으로... 그가 행한 기적이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을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었다는 것이라고나 할까?

두 분의 가르침은 어떻게 다를까? 예수는 자기를 믿고 따르기만 하면 죽어서 천당을 갈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하느님 이외의 어떤 신도 믿으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무시무시하게 겁을 주신다.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절대로 천당에를 갈 수가 없다고 한다. 천당은 과연 죽어서라도 꼭 가 볼만한 그런 좋은 곳인가? 나도 한 번 가 보고싶기는 하다. 혹시 천당 가는 암표는 어디 팔지 않나?

그런데 부처님은 절대로 부처를 믿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오히려 “너 스스로를 믿고 진리를 따르라”고 하신다. (자등명 법등명) 그가 한 일이라고는 그 진리가 무엇인지를 발견해 낸 것 밖에 없다. 그 진리라는 것도 자기가 만들어 낸 창조적인 아이디어도 아니고 원래 있던 것을 찾아 낸 것뿐이라고 고백을 하셨다. 부처님은 그가 발견해 낸 진리를 그의 평생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는 일을 하시다가 80세에 돌아 가셨다. 그리고 그는 예수처럼 다시 살아나지도 않으셨다. 다만 그가 발견해 낸 진리(법)와 그의 가르침만이 2,5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 있을 뿐이다.

예수는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예수와 하느님 (예수도 하느님도 지금 다 살아 계신다)을 믿으면 죽어서 천당을 갈 뿐 아니라 그 천당은 가기만 하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교회에 가서 열심히 기도를 하면 사업도 잘 되고, 아들도 낳고, 병도 낫게 해 주시고, 아들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게 해 주시고, ... 원래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니 (전지전능) 안 될 것이 하나도 없다. 열심히 예수를 믿기만 하면 ... 이 얼마나 엄청나고 쉬운 길인가?

그런데 부처님은 어떻게 가르치시는가? 서울대학에 가려면 기도가 아니라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고, 사업이 잘 되게 하려면 염불이 아니라 일을 열심히 해야 되고, 병이 낫게 하려면 새벽 예불이 아니라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거나 침을 맞아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기도로 병을 낫게 하고, 염불로 아들 서울대학 입학 시키려고 하고, 새벽예불 참석으로 사업이 번창하게 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어리석기 때문이라고 가르치신다. 수행 또는 기도를 열심히 해서 물 위를 걸어 보겠다고 하는 짓은 바보나(무명) 하는 짓이라고 한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 때문에 모든 결과들이 초래된다고 한다. 아니 땐 굴뚝에는 연기가 나지 않는단다. 이런 대부분의 가르침들이란 우리가 다 아는 소리 아닌가? 그렇다. 우리가 모두 다 아는 진리다. 자연과 우주 삼라만상의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그런데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배우고, 따르는 부처님의 제자(불자)들이라고 하면서 혹시 기독교식으로 절에 다니지는 않는가? 법당에서 절을 하면서 귀가 크고 인도식 옷을 입은 예수님 또는 하느님에게 소원 들어 달라고 비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복권 사는 기분으로 법당의 복전함에 보시를 하는 것은 아닌가? 수행을 한다면서 사실은 도교식의 수련(나는 그것을 종종 숨쉬기 운동이라고 부른다)을 열심히 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그런 수련을 열심히 해서 물 위를 한 번 걸어 보겠다거나 공중부양을 해 보겠다는 또는 천안통을 얻어서 상대방의 운명을 알아 맞춰 보겠다는 바보 같은 욕심을 부리고 있지는 않는가? 한 번 곰곰이 반성해 볼 일이다.

"귀신 씨니릭 까먹는 소리" 하기 놀음

우리 나라 불교는 소위 선불교가 주류라고 할 수 있다. 선불교에는 당연히 유명한 선사들의 가르침이 있다.

그런데 유명한 선사들의 말씀들을 (선어록) 보면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아리송한 또는 말이 잘 안되는 것 같은 말들이 대부분이다. 그 말들을 나는 가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한다.

그 훌륭한 말들이 내 귀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리는 까닭은 내가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 불자들에게는 그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흉내내기 놀음병이 혹시 있는 것은 아닐까? 특히 불교에 관한 책을 좀 읽었거나 참선이란 것을 좀 했다 싶은 사람들은 그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흉내를 내야만 한 소식 한 것처럼 생각하는 소위 "참선병", "공안병", "화두병" 또는 "선문답병", ....

그리고 화두선이 최고 경지의 수행법이고 화두선을 통해서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착각들....

이런 것들이 다 선불교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같은 것은 전혀 안 하셨던 것 같은데...

부처님 말씀들은 전부 쉽고 명료한 말씀들 뿐인데...

도신 두 손 모음 _()_()_()_

2008년 7월 30일 수요일

광쩌우에서 관세음보살을 만나다

지난 12월 11일 - 18일 홍콩과 광쩌우를 다녀 왔다. 3일간 홍콩에서 학술대회를 참석하고, 홍콩까지 간 김에 광쩌우를 들러 보기로 했다. 광쩌우에는 25년 전 미국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구가 있어서 민폐 끼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3일간 광쩌우에 머무는 동안 그 친구가 관광 가이드 역할을 해 주기로 했기 때문.

광쩌우에 도착하는 날은 법촌의 장두일씨가 소개해 준 신부님을 만나서 거한 저녁 대접을 받고 잘 놀았다.그리고 둘째 날 관광은 잘 했는데, 그 다음날은 이 친구가 학교에서 강의, 회의 등으로 바빠서 나를 돌봐 줄 수가 없단다.하는 수 없이 혼자서 놀아야 하는데... 광동말은 커녕 중국말도 한마디 못하니... 그렇다고 호텔 방에서 빈둥거릴 수도 없고...무작정 혼자서 밖으로 나갔다. 택시는 절대 안 타기로 하고, 오로지 지도와 지하철에만 의존해서 시내 구경을 하기로 결정.(지도와 지하철만 믿는 것이 경험상 가장 안전한 방법)

우선 달마 스님과 6조 혜능 스님의 흔적이 있는 광효사와 육용사를 둘러 보고, 청대에 지어진 광동성 진씨 가문의 사당 겸 서원인 진가사를 둘러 보기로 했다. 그런데 진가사에 도착했을 때는 너무 많이 걸어서 다리도 아프고 피곤해서 발맛사지를 좀 받는게 급한 일이었다. 그런데 발맛사지 장소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운이 없는지 영어가 통하는 사람을 하나도 만날 수도 없었고... 하는 수 없이 발맛사지는 포기하고, 진가사를 그냥 둘러 봤다. 진가사는 박물관으로 개조했는데, 다구 파는데가 있어서 들렀더니 사람들이 둘러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차 마시는 분위기에는 워낙 익숙한지라 무조건 앉아서 차를 얻어 마시며 놀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사건은 시작된다. 젊은 처녀 하나가 떠듬떠듬이지만 영어가 좀 되는 아가씨를 만났다. 그래서 발맛사지 하는 곳을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마침 그 아가씨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발맛사지 받으러 갈 거니 따라 가면 된단다. (자기 집 근처) 나중에 안 거지만 그 둘은 모녀지간이었다. 구세주를 만난 셈이다. 그래서 두 모녀를 따라서 나서게 되었다.

진가사에서 좀 가야 하는데 버스를 탈 수도 있고 택시를 탈 수도 있단다. 택시를 타면 얼마쯤 나오냐니까 기본요금 정도.(10원 미만). 그래서 차비는 내가 낼테니 택시를 타자고 해서 택시를 탓는데... 물론 택시비를 내가 낼 요량으로 나는 앞에 타고, 모녀는 뒤에 타고... 그런데 도착해서는 이 아가씨가 택시비를 내는 게 아닌가? 운전수에게 내 돈을 받으라고 우겼지만 안 통했다. 나는 택시 기사와 말이 안 통하고 그 아가씨는 말이 통하니 내가 이길 수가 없다.어쩔 수 없이 그 싸움에서는 지고 일단은 내려서 돈을 주려고 했으나 한사코 거절을 해서 실패했다. 일단 그 싸움에서는 졌다. 그래서 내가 제안을 했다. 그럼 그 아가씨와 어머니 두 사람 발맛사지 비용을 내가 부담하겠다고 제안을 했다. 물론 거절 당했다. 그건 절대 안 된단다.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가 겨우 이번엔 내가 이겼다. 그 아가씨도 그 어머니도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봤다. 이제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런데 또 사건이 벌어졌다. 발맛사지가 끝나고 나와서 계산을 하려니까 그 어머니가 이미 계산을 다 해버렸단다.아니, 이럴 수가 있나? 이건 "반칙이다," "약속 위반이다"라고 우겨도 두 모녀는 막무가내다. 내가 돈을 주려고 억지를 써 봤지만 통하지 않는다. 도무지 안 받는다. 어찌 해 볼 도리거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마지막으로 원수(?) 갚을 방법을 모색해서... 그럼 어디 가서 차를 마시든지 밥을 먹든지 하자고 제안했다. (그때가 대충 저녁 식사 시간쯤이었다.) 그런데 이제 집에 들어가야 할 시간이라서 안 된단다. 대신 내가 무사히 호텔에 돌아 갈 수 있도록 택시를 잡아서 택시 기사에게 말해 줄테니 안전하게 호텔로 돌아 가란다.또 졌다. 어쩔 수 없이 잡아 주는 택시를 타고 무사하고 안전하게 호텔로 돌아 왔다.

이 두 모녀. 천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관세음모살의 화신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관광지에서 우연히 처음 만난 사람들. 다시 만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제로 퍼센트.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에게 이런 자비를 배푼단 말인가? 물론 길 안내 정도 또는 택시비 내는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 특히 상대가 젊고 예쁜 여성인 경우에는 더욱 더 그렇다. 그런데 내가 당한(?) 경우는 설명이 안 된다.상상하기조차 힘든 사건이다. 정녕 관세음보살의 화신이 아니고서야, 천사가 아니고서야 이럴 수가 있을까?

그날 밤 여러가지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삶, 사랑, 가치, 인연, 도움, 행복, 복, .......우연히도, 정말 너무나 우연히도 큰 스승들을 만났었다. 내가 이 지구에서 이런 사람들하고 같이 숨을 쉬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너무 행복하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제법 잘난 척 하며 우쭐대고 뽐내며 살아 가는 초라한 내 모습이란...얼마나 우습고 가소로운 인생인가?

정말로 행복하고 큰 깨달음을 얻은 여행이었다. 광쩌우에서 만난 관세음보살들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자율 또는 자유 의지

세상는 자세히 살펴 보면 재미있는 일들이 많다.

어떤 현상 또는 우리의 행동들이 나 스스로 하는가 아니면 타의에 의해서 움직이는가에 따라 다르게 불려진다. 또는 그 원인이나 동기가 무엇인가에 따라서도 같은 현상들을 다르게 일컫기도 한다.

우리가 스스로 적게 쓰면 검소하다고 하고, 타의에 의해 적게 쓰면 가난이라고 한다.
스스로 자기를 낮추면 겸손하다고 하고, 타의에 의해 자기를 낮추면 비굴하다고 한다.
일을 해 주고 스스로 돈을 받지 않으면 자원봉사, 돈을 받아야 하는데 받지 못하면 강제 노동.
아무것도 주고받지 않고 성관계를 맺으면 사랑을 나눈 것이고, 돈을 주고 받으면 매매춘이 된다.
남녀가 합쳐야 성관계 이루어지는데, 돈을 주는 쪽은 즐기는 것이고, 돈을 받는 쪽은 몸을 판다고 한다. (사실은 영혼 까지도...)

돈을 주고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면 놀이가 되는데, 돈을 받고 노래하면 노동이 된다.
나이트에 가서 돈주고 춤을 추면 놀이가 되고, 돈을 받고 춤을 추면 노동이 된다.
돈을 주고 술을 마시면 놀이가 되지만, 돈을 받고 술을 마시면 역시 노동이다. (술상무?)
돈 십만원 줄테니 봉정암까지 가서 무언가 전해 주는 심부름좀 하라고 하면 대부분 거절을 하지만 (일이라고 생각 되니까),
스스로 고생고생 하면서 봉정암까지 아무것도 받지 않고 기어 오른다 (놀이라고 생각하니까).

스스로 세상을 위해 목숨을 버리면 순교라고 하고, 타의에 의해 버려지면 살해되었다고 한다.
스스로 재물을 남에게 주면 보시가 되는데, 타의에 의해 주게 되면 강탈 당한 것이 된다.

이처럼 같은 현상이지만 자발성 또는 자유의지에 기초할 때 만이 진정하게 가치 있는 일임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역시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이어야 하고, 내 행복은 내 마음 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들 법문에는 "주인공"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가 보다.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나 다른 애완동물들은 오로지 주인에게 잘 보이려고 애교를 떤다. 그래야 밥도 많이 주고, 맛있는 것도 많이 주니까... 그래서 그렇게 살면 개같은 인생(음... 견생이라고 해야 하나...?)이 될 것이리라.

우리는 혹시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행동하는 적이 없을까?
그래서 나는 없고 남의 눈에 비치는 내 껍데기를 위해 살지는 않는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화장을 하고 예쁜 옷 입고,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부 잘 하고,
직장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일 열심히 일하고,

친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억지 웃음을 웃고,
힘있는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부하고,
하느님 또는 부처님께 잘 보이기 위해 보시하고,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착한 일 하고,
내신성적 때문에 봉사활동 하고,

............

기문의 횡수 _()_()_()_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이런 사람이 어떻게 서울 시장이 되었을까?
이런 걸 두고 맛이 갔다고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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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서>

흐르는 역사 속에서 서울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하심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거룩한 도시이며,
서울의 시민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서울의 교회와 기독인들은
수도 서울을 지키는 영적 파수꾼임을 선포하며,
서울의 회복과 부흥을 꿈꾸고 기도하는
서울 기독 청년들의 마음과 정성을 담아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합니다.

2004년 5월 31일
서울특별시장 이명박 장로 외
서울의 부흥을 꿈꾸며 기도하는 서울 기독청년 일동

첫 경험 (퍼온글)

첫 경험

나는 오늘 처음으로 경험했다
작은 방에서
내 마음 속의 그 분께 모든 걸 드렸다.

가슴 뛰는 설레임과
처음이란 두려움으로 맞이한
첫 경험...

그러나 모든 게 끝난 지금
아무 생각도 나질 않는다
이런 게 어른이 된다는 걸까?

부끄러움에
수줍게 뒤를 돌아 보니
하얀 색 위에 선명한
빨간 흔적...

내가 실수 한 건 아닐까?
그러나 후회하진 않아
내가 선택한 것이니까

내 맘을 가져 간 그분을 탓하진 않아
친구들은 스무살 때 경험했다던데 뭐
내 나이 이제 스물 하나
그래...
난 이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야

그러나...
그러나...
자꾸 밀려드는 이 허무함은 무얼까?

아아...
투표란 이런 것인가?

모든 권위는 존중되어야 한다

모든 권위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대통령, 국회, 선관위, 검찰, 헌법재판소, ...
모두 그 권위가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대통령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리이지 그 대통령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노무현이든 안노무현이든... 또는 김무현이든...

대통령의 권위가 인정되듯이 국회의 권위도 인정되어야 합니다. 만일 탄핵소추 제도가 불합리하다면 헌법을 먼저 고쳐서 대통령 탄핵제도를 없애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헌법에 있는 제도를 무시하고 촛불 들고 군중들이 결정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헌법재판소의 권위와 그 결정은 어떤 경우에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만일 헌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개헌을 해서 헌법재판소를 없애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헌재를 두고 촛불 든 군중들이 판단하겠다고 하면 안됩니다.

이런 결정이 나면 존중하고, 저런 결정이 나면 항거하겠다는 생각... 바로 인민 재판입니다. (요줌 분위기로 봐서는 만일 헌재에서 탄핵안이 가결되면 이제는 촛불이 아니라 횃불 집회로 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니. 시민 폭동으로 유도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헌법재판소는 왜 있어야 합니까? "이런 결정이 나면 받아들이고, 저런 결정이 나면 횃불집회로 응징하겠다?" -- 이건 민주주의도 아니고 개혁도 아니고, 헌법을 수호하는 것도 아니고, XX도 아닙니다.

촛불 집회가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영향을 (사실은 위협을) 줄 이유도 없고 그럴 의도는 전혀 없다구요? 정말 논리적 모순입니다. 영향을 주지 않으려면 촛불집회를 왜 합니까? 방송과 정치권에서는 왜 촛불 집회를 선동합니까? 더구나 김용옥 같은 사람은 학생들에게 촛불 들고 길거리 나가지 않는다고 야단칩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영향을 줄 생각이 전혀 없다구요? 누가 그 말을 믿겠습니까?

앞으로 모든 법원 앞에서 매일 군중들이 와서 데모할까 두렵습니다. 법원과 판사는 왜 존재합니까? 법원의 권위와 결정은 어떤 경우에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판사들의 판단을 믿지 못하겠다면, 헌법을 바꿔서 판사와 법원을 없애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군중들이 인민재판으로 판결을 하면 됩니다.


노사모가 있으면 반노사모 또는 노미모(노무현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모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미모도 존중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노무현은 그냥 노무현입니다. 지금은 그냥 대한민국 대통령이구요. 대한민국 대통령은 탄핵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노무현은 "경애하는... 어쩌고 저쩌고 ... 수령"이 아닙니다. 그냥 대한민국 대통령일 뿐입니다. 탄핵소추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그런 대통령일 뿐입니다. 탄핵소추의 발의는 국회가 하도록 되어 있고, 그 최종 판단은 헌법재판소에서 하도록 헌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 권위와 책임, 권한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만일 이 제도가 불합리한 것이라면, 헌법을 개정해서 국회의 탄핵소추 발의권을 없애고, 헌법재판소를 없애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법치주의입니다.

193명의 국회의원들... 그 중에 부패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 대한민국 국민들은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국회의원들이 부패했다고 해서 국회의원으로서 할 일을 못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나쁜 짓 약간 했다고 해서 (경선자금, 대선자금, 측근비리, 말장난, ... 등등) 군중이 촛불 들고 모여서 대통령의 할 일을 못 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은 선거를 통해서입니다. 선거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는 위급한 상황이라면 적절한 절차(국회의 탄핵소추)를 거쳐서 권한을 정지시키면 됩니다. 그리고 헌법재판소가 판단하면 됩니다. 그것이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의 권한에 대한 견제 수단입니다. 절대로 군중들이 촛불 들고 문화행사라는 이름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국회의원들을 믿을 수가 없다구요? 그러면 국회의 기능을 정지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런 국회의원을 솎아 내면 됩니다. 검찰을 통해서.... 선거를 통해서.... 그래도 국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개헌을 해서 국회라는 걸 없애 버리면 됩니다. 그리고 군중이 국회의 임무를 대신하면 됩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의 권위가-노무현의 권위가 아닌-존중되는 사회, 그리고 모든 헌법기관의 권위가 존중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존중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개인(특히 정치인)에 대한 숭배는 정말로 위험합니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혹시나 "위대하시고 우리 민중을 사랑하시는 경애하는 어쩌고 저쩌고... 노무현 대통령" 이 탄생되지 말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04. 3. 29. 정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