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30일 토요일

문화경제학

결국 7명 이 남아서...
폐강입니다.

노력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2008년 8월 29일 금요일

2008년 8월 28일 목요일

문화 경제학...

이번 학기 문화 경제학...

초기 수강신청자 38명이었다.

첫 시간에 나의 주문 사항은 ...

1. 영어로 된 글 읽기 연습을 주로 할 것이다.
2.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일주일에 10시간 이상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결과...

12명 남았다...
아마도 내일이면 더 줄어서 폐강이 될 전망.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경제학 원론 첫 시간부터 줄곧 가르쳐 온 것이
"There is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 (세상에 공짜란 없다)"
이었는데...

2008년 8월 23일 토요일

점심





오랜만에 식구들과 외식. 왕 비싼 산토리니...


2008년 8월 21일 목요일

2008년 8월 20일 수요일

경제성장과 인간다운 삶

경제 성장과 인간다운 삶

정기문 (강원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가끔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라는 질문을 하면 흔히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여기서 ‘잘 먹고 잘 산다’라는 말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해 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면 물질적인 풍요는 어떻게 얻어지는가? 이는 소위 활발한 생산 활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자동차를 더 많이 만들고, 집을 더 많이 짓고, 철도를 더 건설하고, 식량을 더 많이 생산하고, ... 등등. 그럴 때 우리는 이 사회에 새로운 것들이 더 많이 생산되었다고 하고, 그 결과를 경제 성장이라고 부른다.

어떤 물건을 “생산”한다고 할 때 우리는 새로운 물건이 이 세상에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새로 만들었다는 물건들은 없던 물건을 새로 창조해 낸 것이 아니라 사실은 기왕에 있던 물질들을 위치와 모양을 바꿔서 재조합 또는 재결합한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생산한다고 하는 경우를 보자. 과연 이 세상에 없던 새로운 자동차가 생겨난 것인가? 자동차를 만든다는 것은 이미 지구상에 있는 어떤 물질들을 모양이나 위치를 바꿔서 그 상태를 바꾸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동차를 생산하는 것과 이 테이블에 있는 사과를 잘라서 저 테이블로 옮겨 놓은 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이러한 물질과 에너지의 변환은 옛날 상태를 파괴하고 새로운 상태를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따라서 생산은 항상 동시에 파괴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없다가 새로 생겨난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새로 생겨나는 것도 없어지는 것도 없고 (불생불멸),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없으며 (불구부정), 늘어나는 것도 줄어드는 것도 없다는 것을 (부증불감)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또한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제행무상)?

그런데 경제학에서는 이러한 생산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고 믿는다. 그래서 생산은 곧 가치의 창조이고, 따라서 생산이 많아질수록 경제가 성장하고 발전한다고 정의한다. 경제가 성장한다는 말은 더 많은 물건을 생산한다는 말과 같은 말로 쓰인다. 이렇게 생산된 것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치를 더해 준다고 해서 “부가가치(value-added)”라고 부르고 이 부가가치를 모두 합하여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이라는 지표를 만들어 한 나라의 경제적 수준을 나타내는 척도로 삼는다.

물건들의 생산이 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고 믿는가? 이는 인간이 물질의 상태를 인위적으로 조작한 결과, 파괴된 상태의 가치보다는 새로 배열된 상태의 가치가 더 크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 활동이 정당화되려면 그 생산을 위해서 반드시 수반되는 파괴된 것의 가치보다 새로 재조합된 것의 가치가 더 커야만 할 것이다. 만일 파괴된 상태의 가치가 새로 생산된 상태의 가치보다 더 크다면 그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훨씬 더 가치있는 행위일 것이다.

예를 들어 골프장을 건설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골프장을 만들면 반드시 자연환경의 파괴가 뒤따른다. 만일 파괴된 자연환경의 가치가 골프장의 가치보다 더 크다면 그 생산 활동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행위이다. 그런데 문제는 생산된 골프장의 가치는 쉽게 시장가격으로 평가가 되지만, 파괴된 자연환경의 가치는 시장에서 쉽게 평가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경제학에서는 파괴된 환경의 가치가 단지 시장에서 쉽게 평가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잊어버리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또 어떤 경우는 생산 그 자체가 파괴를 위한 생산인 경우도 있다. 무기의 생산은 그 목적 자체가 파괴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파괴를 위한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훨씬 더 많은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생산을 하지 않는 것이 생산을 하는 경우보다 그 가치가 클 경우는 흔히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골프장이 건설되고 무기나 마약 등이 많이 생산되면 국내총생산은 증가하고 따라서 경제는 성장하는 것으로만 인식한다.

생산 활동의 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결국 그 생산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파괴된 것의 가치를 충분히 고려해야만 한다. 어떤 경우는 생산 활동에는 적게 참여하지만 소비를 적게 하여 파괴를 적게 함으로써 인류 복지에 훨씬 더 크게 기여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우리 생각에 의하면 보다 많은 생산--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파괴--은 더 많은 가치를 생성하고, 이는 궁극적으로 소비활동을 통하여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 인간의 행복에 기여한다고 믿으며, 그러한 생산 활동만이 경제를 성장하고 발전시킨다고 보는 것이다.

서양사상과 동양사상의 중요한 차이 중의 하나는 서양에서는 많은 것을 직선적 또는 단일 방향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동양에서는 많은 경우 순환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서양에서는 시간이 한쪽 방향으로만 계속해서 흐른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동양에서는 시간이 일정 주기로 순환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서양에서는 인류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발전이라는 것은 주로 경제의 성장 또는 “물질적 풍요로움의 확대”로 정의된다. 그래서 경제 성장이라는 것은 대부분 좋은 것으로 생각된다. (부자, 큰 기업, 부유하고 강한 나라, ... )

그러나 경제를 하나의 순환체계로 보면, 큰 경제 또는 빨리 성장하는 경제보다는 순환이 원활한 “건강한 경제”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키가 크고 몸이 비대한 사람이 반드시 더 건강한 것이 아니고, 근육질이 지나치게 발달한 보디빌더들의 수명이 더 길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경제를 이처럼 성장하는 어떤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순환체계로 인식하게 되면 빨리 성장하는 경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순환이 원활한 “건강한 경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끝없는 인간의 욕망과 이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물질적 자원의 제한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소위 생산과 소비를 통해서 인간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켜 나가려고 노력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적 욕구 자체를 줄여 나가거나 궁극적으로는 그런 욕망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방법일 것이다. 과연 어떤 방법이 효과적이고 실현가능한 것일까?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대부분 감각적 쾌락이나 물질적 욕망의 충족을 통해서 행복이 얻어진다고 믿는다.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더 좋은 집에서 살고, ... 이런 종류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경제활동-생산, 소비, 거래 등-을 한다. 행복 이라는 것은 활발한 경제활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을 충족하려고 함으로써가 아니라 이에 대한 집착을 버려서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던가.

부처님께서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바로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이 갈애와 집착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무상(無常)이고, 고(苦)이며, 무아(無我)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우리가 이것을 깨닫게 되면 어떤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고, 결국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올바로 사물을 보게 되는 지혜를 얻게 되면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

(월간 불광)

2008년 8월 13일 수요일

있는 그대로 보기의 어려움

부처님께서는 사물을 볼 때 편견을 갖지 말고 항상 "있는 그대로" 보라고 가르치십니다. 얼마 전 착시현상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믿으려고 엄청난 노력을 해도 여러가지 주위의 장애물(?)들 때문에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때도, 다른 사람의 견해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겠지요.

최근 제가 물의(?)를 일으켰던 소위 일련의 "귀신 씨나락..." 시리즈 (원래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 어떻게 하다가 보니 3편까지 나오는 시리즈가 되었습니다)에 대한 반응들을 보면서, "아~~ 내가 하는 이야기는 조중동 찌라시에 실린 글 취급을 받는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꼭 같은 글이 "조중동에 실리면 쓰레기, 한겨레 또는 오마이뉴스에 실리면 옥고" 가 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바로 그 정반대가 되는가 봅니다. 바로 "있는 그대로" 읽고, 보고, 듣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겠지요.

이처럼 우리가 "있는 그대로" 보려고 엄청나게 노력을 해도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닐진데, 미리 편견을 갖고 보거나 읽으면 "있는 그대로"와는 거리가 한참 멀어질 것입니다. 하물며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또는 "한번 적이면 영원한 적"이란 기분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객관적" 이라는 말과는 아주 아주 거리가 멀어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가 자기 생각대로 이야기를 하고 또 살아 갑니다. 그러나 나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주고 받는 소위 소통의 기술이 필요할 겁니다. 그래야 발전이 있다고 봅니다.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 하고만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 갈등은 물론 없겠지만 맨날 그기서 그자리에 맴돌 뿐입니다. 그래서 칭찬이 욕보다 더 무섭다고 하는 건가 봅니다. 때로는 치열하다 싶을 정도의 논쟁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런 논쟁 중에 상대방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면 안 되겠지요. 물론 "빈정대는 말투"는 금물이구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인격에 관한 이야기는 가능하면 하지 말고, 논제 또는 이슈 자체에만 집중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좋은 논쟁에서는 "미움"도 "이쁨"도 금물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우리는 감정을 갖고 살아 가는 동물이니까... (토론의 기술을 배우고싶으신 분은 그 유명한 "밀린다왕문경"을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부처세상의 건전한 토론 문화를 위해서 다 같이 노력해 보심이 어떨런지요?

도신 두 손 모음 _()_()_()_

2008년 8월 9일 토요일

귀신 씨나락 ... 3

차한잔을마시며

귀신 씨나락 ... 3
정기문 08/08/09 17:36 | 조회수 0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는 말의 어감이 좋지 않아서 거부감이 많은 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쓰는 이유는 적절한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아서입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외우고 있는 한문본 반야심경을 "그 뜻도 모르고 단지 주문 외우듯 하는 것"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지금의 전통을 폄훼하거나 헐뜯자는 것, 절대 아닙니다.
저도 지금 한문본 반야심경 암송하고, 한문본 예불문 암송합니다. (그리고 사실 저는 아마도 한문을 상당히 잘 하는 편에 속할 겁니다)

물론 반야심경의 뜻을 잘 알고 암송하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그러나 한문으로 된 반야심경을 우리 말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왜 반야심경만 빼고 다른 경전은 전부 한글 번역본으로 읽을까요?
과연 한문본 반야심경 암송의 전통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삼귀의와 사홍서원이 한굴로 번역되어 노래로 불려질 때 얼마나 큰 반발이 있었나요?

또 다른 문제의 제기입니다.
지금까지 일으킨 문제로도 모자라서 또 문제를 일으키냐구요?
ㅎㅎㅎ 글쎄요...

우리가 자주 암송하는 천수경 신묘장구 대다라니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정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아닐까요?

신묘장구 대다라니는 원래 범어(산스크리트어)로 된 것을 한자로 음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 글자를 또 다시 우리 글자로 음역한 것이 지금 우리가 외우고 있는 천수 다라니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중국 글자는 여러가지 소리를 음사하는데는 매우 부족한 글자입니다. 특히 거의 모든 소리를 표현해 낼 수 우리 있는 한글에 비해서는 아주 형편없는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중국의 한문 글자가 한글보다 못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민 다양한 소리를 표현하기에는 ...) 범어 => 한자로 음역 => 다시 한글로 음역... 이러니 원래 소리와는 상당히 멀어진 소리가 되는 게 당영하겠죠?

다행히 최근에 훌륭한 신묘장구 대다라니가 우리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제 주장은 이 번역을 토대로 해서 더 잘 다듬고 운율을 맞추고 해서 암송용으로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어렵다면 차라리 범어 원음에 가까운 새로운 버전 (한글 버전?)으로 바꾸는 것이 더 합당할 듯... 물론 이것도 전통과 익숙함을 잃는 것입니다. 또 새로 외워야 하는 부담도 크구요... 그래도 잘못된, 또는 덜 비슷한 것을 계속해서 외우고 있는 것 보다는 그게 더 낫지 않을까요?

우리가 지금 암송하는 다라니

신묘장구대다라니 (神妙章句大陀羅尼)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 마하 사다바야 마하가로 니가야 옴 살바 바예수
다라나 가라야 다사명 나막 가리다바 이맘알야 바로기제
새바라 다바 니라간타 나막 하리나야 마발다 이사미
살발타 사다남 수반 아예염 살바 보다남 바바말아
미수다감 다냐타 옴 아로계 아로가 마지로가 지가란제
혜혜하례 마하모지 사다바 사마라 사마라 하리나야
구로구로 갈마 사다야 사다야 도로도로 미연제 마하미연제
다라다라 다린나례 새바라 자라자라 마라 미마라 아마라
몰제 예혜혜 로계 새바라 라아 미사미 나사야 나베
사미사미 나사야 모하자라 미사미 나사야 호로호로
마라호로 하례 바나마 나바 사라사라 시리시리 소로소로
못쟈못쟈 모다야 모다야 매다라야 니라간타 가마사 날사남
바라 하라나야 마낙사바하 싯다야 사바하 마하싯다야 사바하
싯다유예 새바라야 사바하 니라간타야 사바하 바라하
목카싱하 목카야 사바하 바나마 하따야 사바하 자가라
욕다야 사바하 상카 섭나네 모다나야 사바하 마하라 구타
다라야 사바하 바마사간타 니사시체다 가릿나 이나야 사바하
먀가라 잘마이바 사나야 사바하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사바하(3번)

원래의 다라니 (범어)

나모 라뜨나 - 뜨라야야 나마 아리야발로끼떼스바랴야 보디싸뜨바야 마하싸뜨바야
마하 -까루니까야 옴 싸르바-바예수 뜨라나-까라야 따스마이 나마쓰-끄리뜨바 이맘
아리야발로끼떼스바라 바시땅 닐라 - 깐타 나모 흐리다얌 아바르따이 씨야미
싸르바르타 싸다남 슈밤 아제얌 싸르바 - 부따남 바바 - 마르가 -비슛다깜 따드 야타
옴 알로께 알로까 - 마띠 로까띠끄란떼 헤 헤 하레 마하 -보디싸뜨바 쓰마라 쓰마라
흐리다얌 꾸르꾸르 까르망 싸다야 싸다야 두루 두루 비자얀떼 마하 비자얀떼
다라 다라 다렌드레스바라 짤라 짤라 말라 - 비말라 아말라-묵띠 에히 에히
로께스바라 라가 - 비샹 비나샤야 드웨샤- 비쌍 비나샤야 모하 - 비샹 비나샤야
훌루 훌루 말라 훌루 훌루 말라 훌루 훌루 하레 빠드마 - 나바 싸라 싸라 씨리 쓰루
쓰루 부디야 부디야 보다야 보다야 마이뜨레야 닐라 -깐타 까마씨야 다르샤남
쁘라흐라다야 - 마나흐 쓰바하 씻다야 쓰바하 마하 - 씻다야 쓰바하
씻다 - 요게스바라야 쓰바하 닐라 - 깐타야 쓰바하 바라하무카 씽하무카야 쓰바하
빠드마 - 하쓰따야 쓰바하 짜끄라 -육따야 쓰바하
샹카 - 샵다네 보다나야 쓰바하 마하 - 라꾸따 -다라야 쓰바하
바마 -쓰칸다 - 디샤 -쓰티따 끄리슈나 - 지나야 쓰바하
비야그라 - 짜르마 - 니바싸나야 쓰바하
나모 라뜨나 - 뜨라야야 나마 아리야발로끼떼스바라야 쓰바하
옴 씨디얀뚜 만뜨라 - 빠다야 쓰바하

한글해석 (전재성 번역)

삼보에 귀의 하나이다
옴- 큰자비심을 지닌 훌륭한 분으로, 모든 두려움에서 보호 하여 주시는
'세상을 굽어살피는 님' 거룩한 관세음보살님께 귀의 하나이다
목에 푸른 빛을 띄우신 님이시여
그에게 귀의 하옵나니,지순하여 겨룰수 없고 ,모든 뭇 삶들의 길을 청정으로 '이끄는'
'이 세상을 굽어살피시는 님' 관세음보살님의 가르침에로 제 마음을 돌이킵니다.
옴 - 아아,밝음이여! 빛과 같은 지혜를 지닌 님이시여! 세상을 뛰어넘은 님이시여!
님이시여! 위대한 보살님이시여! 당신은 마음을 살피고 또 살피시어
일을 하시고 또 하시고 이루고 또 이루시고, 펴시고 또 펴십시오.
승리하는 님이시여! 크낙하게 승리하는 님이시여! 호지 하십시오.호지하십시오
번갯불을 호지하는 님이시여! 움직이십시오, 움직이십시오.
티끌을 떠난 님이여! 청정한 해탈의 님이시여! 오십시오,오십시오.
세계를 '주재하는' 님이시여! 탐욕의 독을 업애게 하시고,
미움의 독을 업애게 하시고
어리석음의 독을 없애게 하십시오
님이시여! 훌루 훌루 말라 훌루 훌루 말라 훌루 훌루!
배꼽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님이시여! 싸라 싸라 씨리 씨리 쓰루 쓰루!
깨달으시고 깨달으셔서,깨닫고 또 깨닫게 하여 주십시오.
자비스러운,목에 푸른 빛을 띄운 님이시여! 애욕을 부숨을 기뻐하면서,쓰바하-
신비한 힘을 성취한 님을 위해서 쓰바하-,
위대한 신비의 오가를 성취한 님을 위해서 쓰바하-
'신비로운 힘의 방편을 지닌'요가 수행자님을 위해서 쓰바하-,
목에 푸른 빛을 띄운 님을 위해서 쓰바하
멧돼지 얼굴과 사자얼굴을 나투신 님을 위해서,쓰바하-
손에 연꽃을 든 님을 위해서, 쓰바하-
보륜을 사용하는 님을 위해서 쓰바하-
진리의 소라고동에서 소리가 울릴 때 우주적인 잠에서 깨어 난 님을 위해서 쓰바하-
큰 주장자를 든 님을 위해서, 쓰바하-
왼쪽 어깨쪽에 서 있는 위신력을 가진 승리자를 위해, 쓰바하-
호랑이 가죽을 두른 거룩한 이께, 쓰바하-
삼보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세상을 굽어살피시는 님'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합니다.
모든 것이 성취될지어다. 이 만뜨라를 위해서 쓰바하-

도신 두 손 모음 _()_()_()_

2008년 8월 8일 금요일

권위라는 환상

우리가 어떤 말의 내용이나 주장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려울 때면 대부분 그 말을 한 사람의 권위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다. 뭐 내가 곰곰히 생각해 봐야 어차피 판단하기 어려울 경우나 또는 곰곰히 생각해 보기가 귀찮으면 그 권위라는 것에 의존하면 편하니까 그 속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부처님께사는 이 점을 항상 경계하라고 가르치신다. 맹신은 백해무익일 뿐이다.

그러면 그 권위라는 것은 대체 어디서 오는가? 또는 그 권위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까

1. 언론 매체

보수주의자들은 조중동에 실린 글들은 무조건 믿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진보주의자들은 조중동에 실린 글들은 무조건 믿지 않고, 한겨레나 오마이뉴스의 기사면 무조건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결과는...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거나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면 너무도 뻔한 것들에 대해서도 거의 백팔십도 다른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이는 신념이나 이념과도 관계가 있다.

2. 이념, 신앙

기독교식 논리와 불교식 논리. 좌파적 주장과 우파적 주장. 이 부분은 "한 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 아무리 이야기하고 설득을 하려고 도무지 씨알이 먹혀 들지를 않는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성경책에 이렇게 씌였다라고 하면 불자들은 무조건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신념이나 이념은 아편보다 더 무섭다고 했던가?

3. 말하는 사람의 학벌, 지위, ... 등등

경제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이성모 원장님이 하면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시큰둥, 정기문이 하면 "음..." 하면서 고개를 끄떡끄떡. 꼭 같은 이야기를 유창희 거사가 하면 시큰둥, 조계사 주지 스님이 하면 "역시..." 하면서 합장.



4. 말하는 사람의 지명도


5. 용어

일반적으로 어려운 용어, 한자어, 영어, 외국어 등을 많이 섞어 쓰면 권위있는 걸로 착각한다.


6. 말하는 사람의 나와의 거리

이 부분이 참 재미있다. 우리 학교 전기공학과 교수가 겪은 에피소드 하나. 집에서 부인에게 전기에 관한 이야기를 어쩌다 하게 되었는데, ... 그 부인 왈 "여보, 텔레비전에서는 그렇게 얘기 안 하던데...?" 이 부인은 남편보다 그 텔레비전에 더 권위를 부여한 것이다. 자기 남편은 전기공학 박사인데도 말이다. 그 부인에게는 그가 전기공학 박사가 아니라 밤낮으로 시원찮은 남편일 뿐이다.

2008년 8월 7일 목요일

귀신 씨나락 ... 2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

이것도 내 귀에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린다. 아마도 연세 높으신 노보살님들은 아침 저녁으로 예불 드릴 때 부처님께 복을 비는 주문으로 알고 있는 건 아닌지? 불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무당들이 무슨 귀신 좇는 주문 쯤으로 생각하지는 않는지?

그나마 삼귀의와 사홍서원은 이제 우리 말로 번역을 해서 노래로 하니 아주 좋아졌다.

다른 경전들은 전부 우리 말로 번역을 해서 쓰면서 유독 아침 저녁으로 예불할 때마다 암송하는 예불문과 반야심경만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가끔 어떤 절에서는 반야심경을 우리 말로 번역해서 쓰는 곳도 있긴 하지만, 번역이 시원치 않아서인지 좀 어색한 듯하다. 특히나 암송용이라면 4-4조 또는 7-5조 등으로 운율이 맞아야 하는데 운율을 고려하지 않고 번역을 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우리 말로 잘 번역된 그리고 운율이 훌륭한 반야심경과 예불문을 노래로 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려 본다.

도신의 횡수였습니다.
_()_()_()_

2008년 8월 1일 금요일

불교적 경제생활

Monthly Magazine Buddha
2548 11 4337 2004

특 집 /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을까? - 불교와 경제/

불교적 경제생활이란 어떤 것인가?

정기문(강원대학교 경제무역학부 교수)

경제생활이란 경제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위한 우리들의 삶의 한 부분이다. 경제문제는 '무 한한 인간의 욕망에 비해 이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물질적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을 말한다. 물질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인간사회는 여러 가지 제도 를 만들고, 그 중에서도 특히 시장이라는 제도의 틀 안에서 소위 경제활동이라고 일컬어지 는 생산, 소비, 거래, 교환 등의 활동을 한다.

끝없는 인간의 욕망과 이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물질적 자원의 제한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소위 경제활동이라 는 것을 통해서 인간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켜 나가는 방법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물질적 욕구를 줄여 나가거나 궁극적으로는 그런 욕망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방법일 것이다. 과연 어떤 방법이 효과적이고 실현 가능한 것일까? 어떤 방식이 불교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불교적 경제생활이란 어떤 것일까?"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무소유'라는 낱말을 떠올리게 된다. 또한 불교적인 올바른 삶의 방식으로 흔히 '무소유'를 강조한다. 그런데 '무소유'의 삶이란 과연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살아간다는 의미인가? 이 를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극단적이고 실현이 불가능한 뜻으로 받 아들일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본질적으로는 소유할 수도 없고 소유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어떤 것을 소유한 다는 것은 무명으로부터 발생하는 우리의 관념의 산물일 뿐이다. 이 세상에 과연 '나' 또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있는가? 우리가 세상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때 '이것을 내가 가졌다'라고 착각할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착각이 바로 괴로움과 불행의 원인이 된다. 다시 말하면 어떤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은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한 수단이다.

≪중아함경≫에 의하면 "만약 옷을 축적하여 선법이 증대하고 악법이 쇠퇴한다면 나는 그 런 옷을 축적해도 좋다. 옷 뿐만이 아닌 음식, 도구, 주택, 촌락 등도 마찬가지다."라고 한다. 결국 무소유를 글자 그대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소 유를 통해서 욕망을 충족할 수가 있는가?' 또는 '과연 이 세상의 무엇이든 소유할 만한 가치 가 있는 것인가?'라는 말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또는 소유라는 것이 무명과 집착에서 비 롯된 망상의 결과라고 한다면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라는 말로 이 해되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이나 물질적 욕망의 충족을 통해서 행복이 얻어진다고 믿는다.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이런 종류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경제활동-생산, 소비, 거래 등-을 한다. 행복 이라는 것은 저 멀리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고, 이는 우리가 활발한 경제활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결국 채워질 수 없는 욕망 을 충족함으로써가 아니라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욕망의 노예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태국의 유명한 붓다다사 스님은 이 렇게 가르치신다. "어떤 것을 소유하거나 어떤 상태로 될 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는 깨달음 을 일으키는 기술이 있다. 그 기술은 사물들을 충분히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면 갈망이 있을 때는 무엇을 소유하거나 무엇이 되려고 하는 감정이 있다는 것과, 갈망이 완전히 사라져 사 물의 특징을 통찰할 때는 사물에 대한 태도가 다소 달라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간단한 예로 '먹기'를 살펴볼 수 있다. 맛있는 음식을 갈망하여 먹는 것은 정견에 따라서 먹는 것과 아주 다르다. 두 가지는 먹는 방법도 다르고, 먹는 동안의 감정도 다르며, 먹고 난 후 일어 난 감정도 다르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맛있는 음식에 대한 갈망이 없어도 역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부처님과 아라한들은 갈애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지만 여전 히 행위를 했으며 어떤 상태로 존재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욕망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보 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이룰 수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가. 행위의 결과로서 생기는 이것 혹은 저것으로 되고 싶은 욕망이나 갈애와 상반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특징에 대한 명확하고 철저한 지혜의 힘[正見]에 의 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우리는 욕망에 따라 동기를 부여받기 때문에 그 결 과 계속 고통의 지배를 당한다."

우리가 모든 종류의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욕망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는 것이 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무상(無常)이고, 고(苦)이며, 무아(無我)라는 것을 알 아야 한다. 진정으로 우리가 이것을 깨닫게 되면 어떤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고, 결국 욕망이 아니라 올바른 견해에 의해 지혜롭게 사물과 관계를 가지게 되며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