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20일 수요일

경제성장과 인간다운 삶

경제 성장과 인간다운 삶

정기문 (강원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가끔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라는 질문을 하면 흔히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여기서 ‘잘 먹고 잘 산다’라는 말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해 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면 물질적인 풍요는 어떻게 얻어지는가? 이는 소위 활발한 생산 활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자동차를 더 많이 만들고, 집을 더 많이 짓고, 철도를 더 건설하고, 식량을 더 많이 생산하고, ... 등등. 그럴 때 우리는 이 사회에 새로운 것들이 더 많이 생산되었다고 하고, 그 결과를 경제 성장이라고 부른다.

어떤 물건을 “생산”한다고 할 때 우리는 새로운 물건이 이 세상에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새로 만들었다는 물건들은 없던 물건을 새로 창조해 낸 것이 아니라 사실은 기왕에 있던 물질들을 위치와 모양을 바꿔서 재조합 또는 재결합한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생산한다고 하는 경우를 보자. 과연 이 세상에 없던 새로운 자동차가 생겨난 것인가? 자동차를 만든다는 것은 이미 지구상에 있는 어떤 물질들을 모양이나 위치를 바꿔서 그 상태를 바꾸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동차를 생산하는 것과 이 테이블에 있는 사과를 잘라서 저 테이블로 옮겨 놓은 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이러한 물질과 에너지의 변환은 옛날 상태를 파괴하고 새로운 상태를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따라서 생산은 항상 동시에 파괴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없다가 새로 생겨난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새로 생겨나는 것도 없어지는 것도 없고 (불생불멸),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없으며 (불구부정), 늘어나는 것도 줄어드는 것도 없다는 것을 (부증불감)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또한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제행무상)?

그런데 경제학에서는 이러한 생산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고 믿는다. 그래서 생산은 곧 가치의 창조이고, 따라서 생산이 많아질수록 경제가 성장하고 발전한다고 정의한다. 경제가 성장한다는 말은 더 많은 물건을 생산한다는 말과 같은 말로 쓰인다. 이렇게 생산된 것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치를 더해 준다고 해서 “부가가치(value-added)”라고 부르고 이 부가가치를 모두 합하여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이라는 지표를 만들어 한 나라의 경제적 수준을 나타내는 척도로 삼는다.

물건들의 생산이 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고 믿는가? 이는 인간이 물질의 상태를 인위적으로 조작한 결과, 파괴된 상태의 가치보다는 새로 배열된 상태의 가치가 더 크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 활동이 정당화되려면 그 생산을 위해서 반드시 수반되는 파괴된 것의 가치보다 새로 재조합된 것의 가치가 더 커야만 할 것이다. 만일 파괴된 상태의 가치가 새로 생산된 상태의 가치보다 더 크다면 그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훨씬 더 가치있는 행위일 것이다.

예를 들어 골프장을 건설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골프장을 만들면 반드시 자연환경의 파괴가 뒤따른다. 만일 파괴된 자연환경의 가치가 골프장의 가치보다 더 크다면 그 생산 활동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행위이다. 그런데 문제는 생산된 골프장의 가치는 쉽게 시장가격으로 평가가 되지만, 파괴된 자연환경의 가치는 시장에서 쉽게 평가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경제학에서는 파괴된 환경의 가치가 단지 시장에서 쉽게 평가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잊어버리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또 어떤 경우는 생산 그 자체가 파괴를 위한 생산인 경우도 있다. 무기의 생산은 그 목적 자체가 파괴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파괴를 위한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훨씬 더 많은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생산을 하지 않는 것이 생산을 하는 경우보다 그 가치가 클 경우는 흔히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골프장이 건설되고 무기나 마약 등이 많이 생산되면 국내총생산은 증가하고 따라서 경제는 성장하는 것으로만 인식한다.

생산 활동의 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결국 그 생산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파괴된 것의 가치를 충분히 고려해야만 한다. 어떤 경우는 생산 활동에는 적게 참여하지만 소비를 적게 하여 파괴를 적게 함으로써 인류 복지에 훨씬 더 크게 기여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우리 생각에 의하면 보다 많은 생산--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파괴--은 더 많은 가치를 생성하고, 이는 궁극적으로 소비활동을 통하여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 인간의 행복에 기여한다고 믿으며, 그러한 생산 활동만이 경제를 성장하고 발전시킨다고 보는 것이다.

서양사상과 동양사상의 중요한 차이 중의 하나는 서양에서는 많은 것을 직선적 또는 단일 방향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동양에서는 많은 경우 순환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서양에서는 시간이 한쪽 방향으로만 계속해서 흐른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동양에서는 시간이 일정 주기로 순환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서양에서는 인류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발전이라는 것은 주로 경제의 성장 또는 “물질적 풍요로움의 확대”로 정의된다. 그래서 경제 성장이라는 것은 대부분 좋은 것으로 생각된다. (부자, 큰 기업, 부유하고 강한 나라, ... )

그러나 경제를 하나의 순환체계로 보면, 큰 경제 또는 빨리 성장하는 경제보다는 순환이 원활한 “건강한 경제”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키가 크고 몸이 비대한 사람이 반드시 더 건강한 것이 아니고, 근육질이 지나치게 발달한 보디빌더들의 수명이 더 길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경제를 이처럼 성장하는 어떤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순환체계로 인식하게 되면 빨리 성장하는 경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순환이 원활한 “건강한 경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끝없는 인간의 욕망과 이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물질적 자원의 제한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소위 생산과 소비를 통해서 인간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켜 나가려고 노력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적 욕구 자체를 줄여 나가거나 궁극적으로는 그런 욕망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방법일 것이다. 과연 어떤 방법이 효과적이고 실현가능한 것일까?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대부분 감각적 쾌락이나 물질적 욕망의 충족을 통해서 행복이 얻어진다고 믿는다.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더 좋은 집에서 살고, ... 이런 종류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경제활동-생산, 소비, 거래 등-을 한다. 행복 이라는 것은 활발한 경제활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을 충족하려고 함으로써가 아니라 이에 대한 집착을 버려서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던가.

부처님께서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바로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이 갈애와 집착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무상(無常)이고, 고(苦)이며, 무아(無我)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우리가 이것을 깨닫게 되면 어떤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고, 결국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올바로 사물을 보게 되는 지혜를 얻게 되면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

(월간 불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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