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20일 토요일

의사소통의 기술

우리가 살면서 서로 의사소통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 의사소통을 하는 수단은 주로 말 또는 글이지요. 언어의 메시지 전달력의 한계는 분명히 있겠지만 그걸 알고서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말이나 글이 거의 유일한 수단일 것입니다. 물론 "염화시중의 미소" 같은 것으로 화답을 하거나, 무슨 암호문 같은 "선문답"으로 멋있는 대화를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내가 말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또는 남의 말을 들을 때 (글을 읽을 때) 약간의 기술이 필요하고, 그 기술을 습득하는데도 약간의 훈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흔히 "남의 말을 잘 듣기" 보다는 내가 "말을 잘 하기"가 훨씬 어렵다고들 생각하기 쉬운데... 제가 보기에는 거꾸로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글을 쓸 때와 남의 글을 읽을 때 조심할 점들 또는 실수하기 쉬운점들을 몇가지 생각해 봤습니다.

글을 쓸 때 조심할 점들...

- 내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히 전달되도록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노력할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표현 방법이나 어휘 선택에 상당히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 비아냥거리는 말투, 과격한 말투, 애매한 표현, 욕설 등은 절대 금물. 특히 빈정거리는 말투가 습관화 된 사람들이 흔히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버릇이기 때문에 많은 노력을 해야 고쳐질 것입니다. (물론 일부러 남의 속을 뒤집어 놓으려고 작심하고 덤비는 경우에는 의도를 갖고 하는 짓이라 막을 도리가 없겠지요. 그런 사람들은 원래 질적으로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냥 쓰레기처럼 취급을 해 버리고 한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리는 것이 최상책입니다.)

- 공개된 게시판에서 글을 쓸 때는 가능하면 지나치게 감정적인 표현이나 낱말은 자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칫 글이 무미건조하여 생명력을 잃기 쉽지만 말썽을 일으킬 소지가 줄어 듭니다. 결국 적절한 조화가 필요할 듯... (물론, 글의 목적이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나 문학적인 글인 경우는 예외이겠지만...)

- 말을 할 때는 뱉어 내고 나면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지만, 글을 쓸 때는 읽어 보고 또 읽어 보고 한 다음에 글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그런 버릇을 들인다. (그런데 제 경우에는 오프 라인에서 글을 다 쓴 다음 올리려고 하면 마치 허공에다 말하는 것 같아서 글도 잘 안 쓰여질 뿐 아니라 글이 딱딱하고 무미건조해지더군요. 그래서 저는 이 방법을 잘 안 씁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때 주의할 점들... (제대로 읽기가 쓰기보다 훨씬 어려운 듯...)

- 게시판의 글읽기를 할 때 많은 경우 휘리릭~~ 읽어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 자칫 글쓴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글 속에 있는 몇몇 낱말이나 표현에 집착해서 그 글의 내용을 속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 바로 오해가 생기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본래의 논지와는 별 상관이 없는 소위 "말꼬투리" 잡고 늘어지기 언쟁(논쟁이 아니라)이 벌어지곤 하지요. 그렇게 하든 말든 결국 읽는 사람의 자유지만, 적어도 댓글을 달고자 할 때는 다시 꼼꼼히 읽어서 글쓴이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 노력을 하더라도 언어의 메시지 전달력의 한계에서 오는 오해는 피할 수가 없는데...

- 글을 비록 세심하게 읽는 경우 마저도 대부분 사람들은 그 글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또는 유리한) 말만 골라서 읽는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같은 글을 읽고도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해석들을 하고는 하지요. 그래서 글쓴이 또는 말하는이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매우 중요한 것이겠지요. 또 그래서 "말하기"보다 "말듣기"가 더 어려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 많은 경우 글 내용이 무엇인가보다 누가 쓴 글인가에 집착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꼭 같은 글이 조선일보에 실렸을 때와 한겨레에 실렸을 때 다르게 판단하는 오류들을 많이 범합니다. 말하자면 글을 읽기 전에 미리 선입견(편견)을 갖고 글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읽는이가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 또는 평소에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 (소위 코드가 맞는 사람)이 쓴 글에서는 내 생각을 굳히는 부분을 열심히 찾게 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흠 잡을 부분을 열심히 찾게 되지요. 결국 얻을 것은 하나도 얻지 못하고 자기 생각이 옳다는 집착만 더 강해질 수 밖에.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로 바보 같은 짓입니다. 자기가 냉철하고 지혜롭게 판단해야 할 일을 남한테 맡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결국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 모여서 어울리고, 편가르기가 되고, ... 일종의 집단 자위행위를 하는 꼴이 되는 것이니요.

그래서 학술 논문을 심사하고 평가할 때는 대부분의 경우 글쓴이의 이름을 드러나지 않게 하고서 평가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블라인드 시스템으로 평가를 하는데도 많은 경우 필자의 논지나 문체 또는 인용문헌 등으로 미루어 필자를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상 "글 쓰기" 및 "글 읽기" 기술(?) 몇 가지를 생각나는데로 적어 봤습니다.

최근 우리 부처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들이 혹시나 본질적인 문제, 아주 중요한 문제, 또는 아주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서 견해가 달라 생기는 문제들이 아니라 바로 "의사소통 기술"의 미숙함에서 오는 문제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다들 부처세상을 너무도 사랑하는 마음들을 갖고 있는 것 같고, 다들 부처세상을 위해 너무 열심히들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다만, 그 사랑하는 방법들이 약간씩 (많이도 아니고 정말로 약간씩) 다를 뿐이고, 거기다가 의사소통의 미숙에서 오는 약간의 (정말로 약간의) 오해에서 밪어진 "약간의" 갈등 같은데... 그것이 어쩌다 보니 심각한 문제처럼 부풀려서 보이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성장과 발전을 위한 진통 정도 ...? 이건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요?

이상 도신의 횡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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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본 불경 악영향의 심각성

얼마 전에는 뜻도 잘 모르고 웅얼웅얼 외우는 한문본 경전 독송 소리를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라고 했다가 불동을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만들어 놓았는데... 또 그놈의 "귀신 씨나락..." 시리즈가 계속되느냐고 짜증 부리시는 분들 아마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지난 "귀신 씨나락..." 논쟁 때 잠깐 이야기 했던 것 처럼 불교는 원래 인도에서 탄생한 종교입니다. 따라서 불교 경전도 당연히 인도말인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범어)로 기록되었었지요. 다만 우리나라 불교가 중국을 거쳐서 들어오다 보니 자연히 한문본 경전과 같이 들어오게 되었죠.

그런데 팔리어나 범어는 아시다시피 우리 말처럼 소리글자를 씁니다. 중국어는 뜻글자인 한자를 쓰구요. 따라서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을 할 때 적절한 중국어 낱말을 찾지 못하면 자연스레 음사(음역)를 해서 그 소리가 비슷하게 되도록 한자로 표기한 것이지요. 예를 들면 "마하," "반야," 바라밀다"... 등등. 마치 우리가 텔레비전, 라디오, .. 등으로 번역(?)을 하는 것처럼...

따라서 한문본 경전에는 그 뜻을 한자말로 바꿔 놓은 낱말들과 단지 소리만 비슷하게 음사한 낱말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 중국사람들은 고유명사들도 뜻풀이를 해서 이름을 새로 지어준 경우도 아주 많습니다. 예를 들면, 나가르주나 ==> 용수, 아상가 ==> 무착, ..등) 그런데 한문도 잘 모르고 인도말도 잘 모르는 우리 한국 사람들이 그것들을 쉽게 구별해 내기는 정말 어렵겠지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공부를 많이 한 스님들께 또는 학자들께 배우는 수 밖에 달리 길이 없습니다.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 (불법)"을 배우고 실천해서 "부처"가 되고자 하는 종교이지요.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이 뭔지도 모르면서 실천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요?

그런데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정말 심각한 문제는...
한문본 경전의 성격이 이렇다 보니 스님들도 자주 헸갈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도말은 잘 모르고 한문은 꽤나 하는 스님의 경우, 음사된 낱말을 한자 뜻 풀이를 하여 억지춘향격으로 뜻을 꿰어 맞추려고 하는 실수를 한다는 것입니다. 음사한 낱말인 경우, 단지 소리만 흉내낸 것이기 때문에 뜻이 안 통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그것을 억지로 뜻을 꿰어 맞추려고 하다 보니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서 소설을 쓰듯이 구라(어? 이거 일본말 같은데...?)를 풀게 되고... 그냥 모른다고 하거나 아님 가만히 있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일은 없을텐데... 아는 체 하는 바람에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해서 가르치게 되고, 무식한 우리는 또 그것을 부처님의 가르침인줄로 배우게 되고...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잘 못 전달되는 것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하지 않을 수 있나요?

지나친 걱정인가요? 얼마 전에 본 아주 유명한 선사 스님의 법문에서 읽은 일이 있는 겁니다. 보살의 뜻을 풀이하는데 "보"자의 뜻은 어쩌고 저쩌고... "살"의 의미는 어쩌고 저쩌고... 그래서 "보살"이란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풀이 해 놓은 걸 봤습니다. 기가 찰 노릇이지요. 보디삿트바 (범어) 또는 보디삿타 (팔리어) ==> 보리살타 (한자어) ==> 줄여서 "보살" 이렇게 된 것을 모르면 실수를 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남에게 자신있게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요? 불법이 왜곡되는데...? 저는 그런 해석은 주저하지 않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특히 선불교에서는) "알음알이"를 쓸데 없는 짓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중요하고도 의미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알음알이", 문자, 또는 언어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그것들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지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더 낫다라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행하는 것, 머리로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불법)을 배우고 행해서 부처가 되고자 하는 종교임에 분명합니다. 달마 스님은 부처님의 훌륭한 제자이고 큰 스승일 뿐이지 불교의 교조가 아닙니다. 혜능 스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신 두 손 모음 _()_()_()_

2008년 9월 7일 일요일

벌초

벌초...

전통이나 관습 vs 효율성

충돌... 갈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