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말이 많아!", "남자들은 확실히 둔해~~"
라고 말을 할 때 여기에는 "일반적으로," "평균적으로," "대부분의 경우에는" 등의 부사구를 생략하고 말을 한다고 알아 들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대응한다.
"에이~~ 그야 사람 나름이죠!" "어? 여자보다 말 많은 남자들도 많던데요...?"
소위 딴지 걸기 또는 말꼬리 물고 늘어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평균적으로" 또는 "많은 경우에" 등을 붙이지 않았다고 시비 거는 꼴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순발력이 뛰어나다," "예리하다"는 등 자부심을 갖고 있는듯 하다.
이런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그 후 몇 번 티격 태격 말이 오가다가는
"당신이 먼저 그런 투로 말했잖아~~" "왜 반말이야~~?"
등등으로 대화의 주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다툼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전형적인 "딴지걸기" 또는 "말꼬리 붙잡기" 선수들과 대화할 때 겪는 과정이다.
그렇다. 우리가 말을 할 때 비록 "~~~하다."라고 단정적으로 말을 하더라도 거기에는 "일반적으로," "많은 경우에," "대부분" 등의 부사구를 생략하고 있다는 것으로 알아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을 정말 피곤하게 만들고,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이런 "딴지걸기" 선수(?)들의 그런 공격(?)을 피하기 위해 조심을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 여기 부처세상 게시판에 글을 쓸 때는 매번 "많은 경우에," "대부분의 경우에," "일반적으로" 등 쓸데없는(?) 부사구를 앞에다 붙이는 몹쓸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 글 또는 말이 어색하게 된다. (버릇대로 하자면 "어색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등)
좋은 대화를, 좋은 소통을 하려면 이런 말꼬리 물고 늘어지기 버릇을 빨리 고쳐야 한다. 대화의 주제에 집중하고, 비록 "~~다."라고 단정적으로 말을 해도 "대충" "대게"를 빼고 말하는구나 라고 알아듣는 연습을 하면 된다.
대화할 때 주의할 점 하나 더...
"결코," "항상," "언제나," "맨날," "절대," ... 등의 강한 부사들은 가능하면 쓰지 않을 것.
그리고 "정말로 말인데..." "솔직히 말해서..." "이건 진짠데..." 등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 그런 부사구는 쓰면 쓸수록 손해이다. 평소에는 솔직하지 못하고 거짓말만 해 왔다는 것으로 오해 받을 소지가 있으니까.
아무튼 매끄러운 대화를 하는 데도 약간의 기술과 훈련이 필요한 듯 하다.
이상 도신의 횡설수설입니다.
_()_()_()_
2008년 10월 5일 일요일
모순
우리가 어디서 좋은 글을 보고는 불동 법우들에게도 보여 주고 싶을 때는 "퍼오기"를 합니다. 그 "퍼오기"란 같은 글을 복사를 해서 여기 불동 게시판에 붙여 놓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같은 글이 양쪽 서버에 저장이 됩니다. 결국 많이 읽히는 어떤 글들은 수없이 많은 복사본들이 여러 컴퓨터 서버들에 저장이 되어 있겟지요.
그런데 그렇게 "퍼오기"를 하지 않고 지난번 제가 소개했던 "모셔가기"를 하면 그렇게 많은 복사본들이 여러 컴퓨터에 중복되게 저장이 되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마우스를 한번 더 클릭하게 하는 부담을 주긴 하지만, 그게 그렇게 큰 부담은 아니겠죠.)
아마도 이런 식으로 낭비되는 서버 컴퓨터의 용량을 따져 보면 엄청날 겁니다. 많이 읽히는 글이 몇 번이나 복사에 복사를 거쳐 갔을까를 상상해 보면 되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왜 그렇게 "퍼오기"를 할 수 밖에 없는가? 바로 우리 나라 포탈들의 폐쇄정책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다음에 있는 어느 카페의 글을 불동 식구들에게도 읽게 히고 싶다면... 저는 양쪽을 들락거릴 수가 있어야 합니다. 즉, 양쪽 열쇠를 다 갖고 있어야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퍼오기"를 잘 하려면 카페, 클럽 등 "폐쇄 동호회"에 많은 열쇠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인터넷의 공개된 게시판에 글을 올릴 때는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 글을 읽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만일 몇 사람들 하고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전자우편, 쪽지, 메모, 메신저, 등의 기능을 사용하면 되니까요.
어떤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원한다면 그 글에 쉽게 접근이 가능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우리나라 카페, 클럽 등의 글들은 열쇠를 가져야만 읽기조차 허용을 합니다.
이런 경우, "모셔가기"는 할 수가 없고, 하는 수 없이 "퍼오기"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게 바로 모순입니다. 많이 읽히기를 원하면서 잘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꼭꼭 걸어 잠그는 모순...
또한 인터넷 공개 게시판에 글을 올릴 때는 많은 사람들이 읽기 바라는 마음일 텐데 그 글을 퍼 가면 "저작권" 침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우습기 짝이 없는 모순...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글읽기가 가능하도록 하면 그 글이 외부로 "퍼가기"를 막을 수가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사실은 어리석은) 생각...
이런 것들이 바로 다음, 네이버, 파란, 등 우리나라 포털 사이트들의 폐쇄정책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거의 세계 1위 수준의 인터넷 사용인구를 갖고 있으면서도 야후나 구글에 밀리는 이유입니다.
얼마 전 몇몇 문제로 약간의 갈등이 있었을 때, 불동의 아름답지 못한 면을 외부로 노출시키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생각 때문에 게시판을 다시 "폐쇄형"으로 바꿔야 되지 않느냐는 의견이 있었던 것을 얼핏 본 것 같은데...
아마도 그건 옳바른 방향이 아닐 겁니다. 우리 불동이 지금 택하고 있는 "개방형" 게시판 정책은 아마도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아주 훌륭한 시스템일 겁니다. 게다가 회원이 아닌 사람에게도 "글쓰기"까지 허용하는 "난장판"이라는 게시판을 갖고 있다는 것은 너무너무 훌륭합니다.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게시판 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어째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은데... 우리가 신세지고 있는 (공짜로 셋방살이 하고 있는) "파란"의 컴퓨터 용량 절약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싶으시면 "퍼오기"보다는 가능하면 "모셔가기"를 자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자원절약"이고 "환경운동"입니다.
도신 두 손 모음 _()_()_()_
그런데 그렇게 "퍼오기"를 하지 않고 지난번 제가 소개했던 "모셔가기"를 하면 그렇게 많은 복사본들이 여러 컴퓨터에 중복되게 저장이 되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마우스를 한번 더 클릭하게 하는 부담을 주긴 하지만, 그게 그렇게 큰 부담은 아니겠죠.)
아마도 이런 식으로 낭비되는 서버 컴퓨터의 용량을 따져 보면 엄청날 겁니다. 많이 읽히는 글이 몇 번이나 복사에 복사를 거쳐 갔을까를 상상해 보면 되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왜 그렇게 "퍼오기"를 할 수 밖에 없는가? 바로 우리 나라 포탈들의 폐쇄정책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다음에 있는 어느 카페의 글을 불동 식구들에게도 읽게 히고 싶다면... 저는 양쪽을 들락거릴 수가 있어야 합니다. 즉, 양쪽 열쇠를 다 갖고 있어야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퍼오기"를 잘 하려면 카페, 클럽 등 "폐쇄 동호회"에 많은 열쇠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인터넷의 공개된 게시판에 글을 올릴 때는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 글을 읽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만일 몇 사람들 하고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전자우편, 쪽지, 메모, 메신저, 등의 기능을 사용하면 되니까요.
어떤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원한다면 그 글에 쉽게 접근이 가능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우리나라 카페, 클럽 등의 글들은 열쇠를 가져야만 읽기조차 허용을 합니다.
이런 경우, "모셔가기"는 할 수가 없고, 하는 수 없이 "퍼오기"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게 바로 모순입니다. 많이 읽히기를 원하면서 잘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꼭꼭 걸어 잠그는 모순...
또한 인터넷 공개 게시판에 글을 올릴 때는 많은 사람들이 읽기 바라는 마음일 텐데 그 글을 퍼 가면 "저작권" 침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우습기 짝이 없는 모순...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글읽기가 가능하도록 하면 그 글이 외부로 "퍼가기"를 막을 수가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사실은 어리석은) 생각...
이런 것들이 바로 다음, 네이버, 파란, 등 우리나라 포털 사이트들의 폐쇄정책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거의 세계 1위 수준의 인터넷 사용인구를 갖고 있으면서도 야후나 구글에 밀리는 이유입니다.
얼마 전 몇몇 문제로 약간의 갈등이 있었을 때, 불동의 아름답지 못한 면을 외부로 노출시키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생각 때문에 게시판을 다시 "폐쇄형"으로 바꿔야 되지 않느냐는 의견이 있었던 것을 얼핏 본 것 같은데...
아마도 그건 옳바른 방향이 아닐 겁니다. 우리 불동이 지금 택하고 있는 "개방형" 게시판 정책은 아마도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아주 훌륭한 시스템일 겁니다. 게다가 회원이 아닌 사람에게도 "글쓰기"까지 허용하는 "난장판"이라는 게시판을 갖고 있다는 것은 너무너무 훌륭합니다.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게시판 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어째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은데... 우리가 신세지고 있는 (공짜로 셋방살이 하고 있는) "파란"의 컴퓨터 용량 절약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싶으시면 "퍼오기"보다는 가능하면 "모셔가기"를 자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자원절약"이고 "환경운동"입니다.
도신 두 손 모음 _()_()_()_
2008년 10월 4일 토요일
망가지는 우리 말과 글
님의 침묵 - 한용운 -
<님아 잠수? - 용우니^^*- >
님은 갔습니다
<님아 가써염.>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헐~~~ ♡하는 니마가 가써염.>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퍼시시한 산빛 쌩까고 단풍나무 숲을 향해>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난 당근 지름길루 걸어서 씨버버리고 가써염.>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빤짝 꽃가치 때꽁하고 빛나던 옛 맹세넌>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절라 차가운 구라가 되가지구 한숨의 미풍에 20000해써염.>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날카론 첫 뻐뻐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내 팔자 도움말 캡숑 바꺼넣코>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뒷달리기로 텨 텨 텨 버려써여.>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지는여 냄새 쌈빡한 니마의 말빨에 뻑가구>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꽃가튼 니마의 얼굴땜시 ㅡ///ㅡ☜ 이랬져>
(중략)
<(잠쉬)>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벙개때 찌져지는걸 시러하는거처럼>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찌져질때 다시 벙개칠걸 미더염>
아아 님은 갔지만는
<흐미~~ 니마는 빠이해찌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지는 니마를 열라 잡거 이써여.>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내 소리 카바 못하넌 러부송은>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니마의 잠수에 다굴 포즈로 도네염.>
<님아 잠수? - 용우니^^*- >
님은 갔습니다
<님아 가써염.>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헐~~~ ♡하는 니마가 가써염.>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퍼시시한 산빛 쌩까고 단풍나무 숲을 향해>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난 당근 지름길루 걸어서 씨버버리고 가써염.>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빤짝 꽃가치 때꽁하고 빛나던 옛 맹세넌>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절라 차가운 구라가 되가지구 한숨의 미풍에 20000해써염.>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날카론 첫 뻐뻐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내 팔자 도움말 캡숑 바꺼넣코>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뒷달리기로 텨 텨 텨 버려써여.>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지는여 냄새 쌈빡한 니마의 말빨에 뻑가구>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꽃가튼 니마의 얼굴땜시 ㅡ///ㅡ☜ 이랬져>
(중략)
<(잠쉬)>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벙개때 찌져지는걸 시러하는거처럼>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찌져질때 다시 벙개칠걸 미더염>
아아 님은 갔지만는
<흐미~~ 니마는 빠이해찌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지는 니마를 열라 잡거 이써여.>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내 소리 카바 못하넌 러부송은>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니마의 잠수에 다굴 포즈로 도네염.>
2008년 9월 20일 토요일
의사소통의 기술
우리가 살면서 서로 의사소통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 의사소통을 하는 수단은 주로 말 또는 글이지요. 언어의 메시지 전달력의 한계는 분명히 있겠지만 그걸 알고서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말이나 글이 거의 유일한 수단일 것입니다. 물론 "염화시중의 미소" 같은 것으로 화답을 하거나, 무슨 암호문 같은 "선문답"으로 멋있는 대화를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내가 말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또는 남의 말을 들을 때 (글을 읽을 때) 약간의 기술이 필요하고, 그 기술을 습득하는데도 약간의 훈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흔히 "남의 말을 잘 듣기" 보다는 내가 "말을 잘 하기"가 훨씬 어렵다고들 생각하기 쉬운데... 제가 보기에는 거꾸로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글을 쓸 때와 남의 글을 읽을 때 조심할 점들 또는 실수하기 쉬운점들을 몇가지 생각해 봤습니다.
글을 쓸 때 조심할 점들...
- 내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히 전달되도록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노력할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표현 방법이나 어휘 선택에 상당히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 비아냥거리는 말투, 과격한 말투, 애매한 표현, 욕설 등은 절대 금물. 특히 빈정거리는 말투가 습관화 된 사람들이 흔히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버릇이기 때문에 많은 노력을 해야 고쳐질 것입니다. (물론 일부러 남의 속을 뒤집어 놓으려고 작심하고 덤비는 경우에는 의도를 갖고 하는 짓이라 막을 도리가 없겠지요. 그런 사람들은 원래 질적으로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냥 쓰레기처럼 취급을 해 버리고 한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리는 것이 최상책입니다.)
- 공개된 게시판에서 글을 쓸 때는 가능하면 지나치게 감정적인 표현이나 낱말은 자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칫 글이 무미건조하여 생명력을 잃기 쉽지만 말썽을 일으킬 소지가 줄어 듭니다. 결국 적절한 조화가 필요할 듯... (물론, 글의 목적이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나 문학적인 글인 경우는 예외이겠지만...)
- 말을 할 때는 뱉어 내고 나면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지만, 글을 쓸 때는 읽어 보고 또 읽어 보고 한 다음에 글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그런 버릇을 들인다. (그런데 제 경우에는 오프 라인에서 글을 다 쓴 다음 올리려고 하면 마치 허공에다 말하는 것 같아서 글도 잘 안 쓰여질 뿐 아니라 글이 딱딱하고 무미건조해지더군요. 그래서 저는 이 방법을 잘 안 씁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때 주의할 점들... (제대로 읽기가 쓰기보다 훨씬 어려운 듯...)
- 게시판의 글읽기를 할 때 많은 경우 휘리릭~~ 읽어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 자칫 글쓴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글 속에 있는 몇몇 낱말이나 표현에 집착해서 그 글의 내용을 속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 바로 오해가 생기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본래의 논지와는 별 상관이 없는 소위 "말꼬투리" 잡고 늘어지기 언쟁(논쟁이 아니라)이 벌어지곤 하지요. 그렇게 하든 말든 결국 읽는 사람의 자유지만, 적어도 댓글을 달고자 할 때는 다시 꼼꼼히 읽어서 글쓴이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 노력을 하더라도 언어의 메시지 전달력의 한계에서 오는 오해는 피할 수가 없는데...
- 글을 비록 세심하게 읽는 경우 마저도 대부분 사람들은 그 글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또는 유리한) 말만 골라서 읽는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같은 글을 읽고도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해석들을 하고는 하지요. 그래서 글쓴이 또는 말하는이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매우 중요한 것이겠지요. 또 그래서 "말하기"보다 "말듣기"가 더 어려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 많은 경우 글 내용이 무엇인가보다 누가 쓴 글인가에 집착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꼭 같은 글이 조선일보에 실렸을 때와 한겨레에 실렸을 때 다르게 판단하는 오류들을 많이 범합니다. 말하자면 글을 읽기 전에 미리 선입견(편견)을 갖고 글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읽는이가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 또는 평소에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 (소위 코드가 맞는 사람)이 쓴 글에서는 내 생각을 굳히는 부분을 열심히 찾게 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흠 잡을 부분을 열심히 찾게 되지요. 결국 얻을 것은 하나도 얻지 못하고 자기 생각이 옳다는 집착만 더 강해질 수 밖에.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로 바보 같은 짓입니다. 자기가 냉철하고 지혜롭게 판단해야 할 일을 남한테 맡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결국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 모여서 어울리고, 편가르기가 되고, ... 일종의 집단 자위행위를 하는 꼴이 되는 것이니요.
그래서 학술 논문을 심사하고 평가할 때는 대부분의 경우 글쓴이의 이름을 드러나지 않게 하고서 평가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블라인드 시스템으로 평가를 하는데도 많은 경우 필자의 논지나 문체 또는 인용문헌 등으로 미루어 필자를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상 "글 쓰기" 및 "글 읽기" 기술(?) 몇 가지를 생각나는데로 적어 봤습니다.
최근 우리 부처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들이 혹시나 본질적인 문제, 아주 중요한 문제, 또는 아주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서 견해가 달라 생기는 문제들이 아니라 바로 "의사소통 기술"의 미숙함에서 오는 문제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다들 부처세상을 너무도 사랑하는 마음들을 갖고 있는 것 같고, 다들 부처세상을 위해 너무 열심히들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다만, 그 사랑하는 방법들이 약간씩 (많이도 아니고 정말로 약간씩) 다를 뿐이고, 거기다가 의사소통의 미숙에서 오는 약간의 (정말로 약간의) 오해에서 밪어진 "약간의" 갈등 같은데... 그것이 어쩌다 보니 심각한 문제처럼 부풀려서 보이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성장과 발전을 위한 진통 정도 ...? 이건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요?
이상 도신의 횡수였습니다.
_()_()_()_
내가 말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또는 남의 말을 들을 때 (글을 읽을 때) 약간의 기술이 필요하고, 그 기술을 습득하는데도 약간의 훈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흔히 "남의 말을 잘 듣기" 보다는 내가 "말을 잘 하기"가 훨씬 어렵다고들 생각하기 쉬운데... 제가 보기에는 거꾸로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글을 쓸 때와 남의 글을 읽을 때 조심할 점들 또는 실수하기 쉬운점들을 몇가지 생각해 봤습니다.
글을 쓸 때 조심할 점들...
- 내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히 전달되도록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노력할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표현 방법이나 어휘 선택에 상당히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 비아냥거리는 말투, 과격한 말투, 애매한 표현, 욕설 등은 절대 금물. 특히 빈정거리는 말투가 습관화 된 사람들이 흔히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버릇이기 때문에 많은 노력을 해야 고쳐질 것입니다. (물론 일부러 남의 속을 뒤집어 놓으려고 작심하고 덤비는 경우에는 의도를 갖고 하는 짓이라 막을 도리가 없겠지요. 그런 사람들은 원래 질적으로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냥 쓰레기처럼 취급을 해 버리고 한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리는 것이 최상책입니다.)
- 공개된 게시판에서 글을 쓸 때는 가능하면 지나치게 감정적인 표현이나 낱말은 자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칫 글이 무미건조하여 생명력을 잃기 쉽지만 말썽을 일으킬 소지가 줄어 듭니다. 결국 적절한 조화가 필요할 듯... (물론, 글의 목적이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나 문학적인 글인 경우는 예외이겠지만...)
- 말을 할 때는 뱉어 내고 나면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지만, 글을 쓸 때는 읽어 보고 또 읽어 보고 한 다음에 글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그런 버릇을 들인다. (그런데 제 경우에는 오프 라인에서 글을 다 쓴 다음 올리려고 하면 마치 허공에다 말하는 것 같아서 글도 잘 안 쓰여질 뿐 아니라 글이 딱딱하고 무미건조해지더군요. 그래서 저는 이 방법을 잘 안 씁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때 주의할 점들... (제대로 읽기가 쓰기보다 훨씬 어려운 듯...)
- 게시판의 글읽기를 할 때 많은 경우 휘리릭~~ 읽어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 자칫 글쓴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글 속에 있는 몇몇 낱말이나 표현에 집착해서 그 글의 내용을 속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 바로 오해가 생기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본래의 논지와는 별 상관이 없는 소위 "말꼬투리" 잡고 늘어지기 언쟁(논쟁이 아니라)이 벌어지곤 하지요. 그렇게 하든 말든 결국 읽는 사람의 자유지만, 적어도 댓글을 달고자 할 때는 다시 꼼꼼히 읽어서 글쓴이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 노력을 하더라도 언어의 메시지 전달력의 한계에서 오는 오해는 피할 수가 없는데...
- 글을 비록 세심하게 읽는 경우 마저도 대부분 사람들은 그 글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또는 유리한) 말만 골라서 읽는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같은 글을 읽고도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해석들을 하고는 하지요. 그래서 글쓴이 또는 말하는이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매우 중요한 것이겠지요. 또 그래서 "말하기"보다 "말듣기"가 더 어려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 많은 경우 글 내용이 무엇인가보다 누가 쓴 글인가에 집착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꼭 같은 글이 조선일보에 실렸을 때와 한겨레에 실렸을 때 다르게 판단하는 오류들을 많이 범합니다. 말하자면 글을 읽기 전에 미리 선입견(편견)을 갖고 글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읽는이가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 또는 평소에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 (소위 코드가 맞는 사람)이 쓴 글에서는 내 생각을 굳히는 부분을 열심히 찾게 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흠 잡을 부분을 열심히 찾게 되지요. 결국 얻을 것은 하나도 얻지 못하고 자기 생각이 옳다는 집착만 더 강해질 수 밖에.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로 바보 같은 짓입니다. 자기가 냉철하고 지혜롭게 판단해야 할 일을 남한테 맡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결국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 모여서 어울리고, 편가르기가 되고, ... 일종의 집단 자위행위를 하는 꼴이 되는 것이니요.
그래서 학술 논문을 심사하고 평가할 때는 대부분의 경우 글쓴이의 이름을 드러나지 않게 하고서 평가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블라인드 시스템으로 평가를 하는데도 많은 경우 필자의 논지나 문체 또는 인용문헌 등으로 미루어 필자를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상 "글 쓰기" 및 "글 읽기" 기술(?) 몇 가지를 생각나는데로 적어 봤습니다.
최근 우리 부처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들이 혹시나 본질적인 문제, 아주 중요한 문제, 또는 아주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서 견해가 달라 생기는 문제들이 아니라 바로 "의사소통 기술"의 미숙함에서 오는 문제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다들 부처세상을 너무도 사랑하는 마음들을 갖고 있는 것 같고, 다들 부처세상을 위해 너무 열심히들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다만, 그 사랑하는 방법들이 약간씩 (많이도 아니고 정말로 약간씩) 다를 뿐이고, 거기다가 의사소통의 미숙에서 오는 약간의 (정말로 약간의) 오해에서 밪어진 "약간의" 갈등 같은데... 그것이 어쩌다 보니 심각한 문제처럼 부풀려서 보이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성장과 발전을 위한 진통 정도 ...? 이건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요?
이상 도신의 횡수였습니다.
_()_()_()_
한문본 불경 악영향의 심각성
얼마 전에는 뜻도 잘 모르고 웅얼웅얼 외우는 한문본 경전 독송 소리를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라고 했다가 불동을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만들어 놓았는데... 또 그놈의 "귀신 씨나락..." 시리즈가 계속되느냐고 짜증 부리시는 분들 아마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지난 "귀신 씨나락..." 논쟁 때 잠깐 이야기 했던 것 처럼 불교는 원래 인도에서 탄생한 종교입니다. 따라서 불교 경전도 당연히 인도말인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범어)로 기록되었었지요. 다만 우리나라 불교가 중국을 거쳐서 들어오다 보니 자연히 한문본 경전과 같이 들어오게 되었죠.
그런데 팔리어나 범어는 아시다시피 우리 말처럼 소리글자를 씁니다. 중국어는 뜻글자인 한자를 쓰구요. 따라서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을 할 때 적절한 중국어 낱말을 찾지 못하면 자연스레 음사(음역)를 해서 그 소리가 비슷하게 되도록 한자로 표기한 것이지요. 예를 들면 "마하," "반야," 바라밀다"... 등등. 마치 우리가 텔레비전, 라디오, .. 등으로 번역(?)을 하는 것처럼...
따라서 한문본 경전에는 그 뜻을 한자말로 바꿔 놓은 낱말들과 단지 소리만 비슷하게 음사한 낱말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 중국사람들은 고유명사들도 뜻풀이를 해서 이름을 새로 지어준 경우도 아주 많습니다. 예를 들면, 나가르주나 ==> 용수, 아상가 ==> 무착, ..등) 그런데 한문도 잘 모르고 인도말도 잘 모르는 우리 한국 사람들이 그것들을 쉽게 구별해 내기는 정말 어렵겠지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공부를 많이 한 스님들께 또는 학자들께 배우는 수 밖에 달리 길이 없습니다.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 (불법)"을 배우고 실천해서 "부처"가 되고자 하는 종교이지요.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이 뭔지도 모르면서 실천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요?
그런데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정말 심각한 문제는...
한문본 경전의 성격이 이렇다 보니 스님들도 자주 헸갈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도말은 잘 모르고 한문은 꽤나 하는 스님의 경우, 음사된 낱말을 한자 뜻 풀이를 하여 억지춘향격으로 뜻을 꿰어 맞추려고 하는 실수를 한다는 것입니다. 음사한 낱말인 경우, 단지 소리만 흉내낸 것이기 때문에 뜻이 안 통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그것을 억지로 뜻을 꿰어 맞추려고 하다 보니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서 소설을 쓰듯이 구라(어? 이거 일본말 같은데...?)를 풀게 되고... 그냥 모른다고 하거나 아님 가만히 있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일은 없을텐데... 아는 체 하는 바람에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해서 가르치게 되고, 무식한 우리는 또 그것을 부처님의 가르침인줄로 배우게 되고...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잘 못 전달되는 것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하지 않을 수 있나요?
지나친 걱정인가요? 얼마 전에 본 아주 유명한 선사 스님의 법문에서 읽은 일이 있는 겁니다. 보살의 뜻을 풀이하는데 "보"자의 뜻은 어쩌고 저쩌고... "살"의 의미는 어쩌고 저쩌고... 그래서 "보살"이란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풀이 해 놓은 걸 봤습니다. 기가 찰 노릇이지요. 보디삿트바 (범어) 또는 보디삿타 (팔리어) ==> 보리살타 (한자어) ==> 줄여서 "보살" 이렇게 된 것을 모르면 실수를 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남에게 자신있게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요? 불법이 왜곡되는데...? 저는 그런 해석은 주저하지 않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특히 선불교에서는) "알음알이"를 쓸데 없는 짓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중요하고도 의미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알음알이", 문자, 또는 언어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그것들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지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더 낫다라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행하는 것, 머리로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불법)을 배우고 행해서 부처가 되고자 하는 종교임에 분명합니다. 달마 스님은 부처님의 훌륭한 제자이고 큰 스승일 뿐이지 불교의 교조가 아닙니다. 혜능 스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신 두 손 모음 _()_()_()_
그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지난 "귀신 씨나락..." 논쟁 때 잠깐 이야기 했던 것 처럼 불교는 원래 인도에서 탄생한 종교입니다. 따라서 불교 경전도 당연히 인도말인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범어)로 기록되었었지요. 다만 우리나라 불교가 중국을 거쳐서 들어오다 보니 자연히 한문본 경전과 같이 들어오게 되었죠.
그런데 팔리어나 범어는 아시다시피 우리 말처럼 소리글자를 씁니다. 중국어는 뜻글자인 한자를 쓰구요. 따라서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을 할 때 적절한 중국어 낱말을 찾지 못하면 자연스레 음사(음역)를 해서 그 소리가 비슷하게 되도록 한자로 표기한 것이지요. 예를 들면 "마하," "반야," 바라밀다"... 등등. 마치 우리가 텔레비전, 라디오, .. 등으로 번역(?)을 하는 것처럼...
따라서 한문본 경전에는 그 뜻을 한자말로 바꿔 놓은 낱말들과 단지 소리만 비슷하게 음사한 낱말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 중국사람들은 고유명사들도 뜻풀이를 해서 이름을 새로 지어준 경우도 아주 많습니다. 예를 들면, 나가르주나 ==> 용수, 아상가 ==> 무착, ..등) 그런데 한문도 잘 모르고 인도말도 잘 모르는 우리 한국 사람들이 그것들을 쉽게 구별해 내기는 정말 어렵겠지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공부를 많이 한 스님들께 또는 학자들께 배우는 수 밖에 달리 길이 없습니다.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 (불법)"을 배우고 실천해서 "부처"가 되고자 하는 종교이지요.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이 뭔지도 모르면서 실천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요?
그런데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정말 심각한 문제는...
한문본 경전의 성격이 이렇다 보니 스님들도 자주 헸갈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도말은 잘 모르고 한문은 꽤나 하는 스님의 경우, 음사된 낱말을 한자 뜻 풀이를 하여 억지춘향격으로 뜻을 꿰어 맞추려고 하는 실수를 한다는 것입니다. 음사한 낱말인 경우, 단지 소리만 흉내낸 것이기 때문에 뜻이 안 통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그것을 억지로 뜻을 꿰어 맞추려고 하다 보니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서 소설을 쓰듯이 구라(어? 이거 일본말 같은데...?)를 풀게 되고... 그냥 모른다고 하거나 아님 가만히 있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일은 없을텐데... 아는 체 하는 바람에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해서 가르치게 되고, 무식한 우리는 또 그것을 부처님의 가르침인줄로 배우게 되고...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잘 못 전달되는 것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하지 않을 수 있나요?
지나친 걱정인가요? 얼마 전에 본 아주 유명한 선사 스님의 법문에서 읽은 일이 있는 겁니다. 보살의 뜻을 풀이하는데 "보"자의 뜻은 어쩌고 저쩌고... "살"의 의미는 어쩌고 저쩌고... 그래서 "보살"이란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풀이 해 놓은 걸 봤습니다. 기가 찰 노릇이지요. 보디삿트바 (범어) 또는 보디삿타 (팔리어) ==> 보리살타 (한자어) ==> 줄여서 "보살" 이렇게 된 것을 모르면 실수를 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남에게 자신있게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요? 불법이 왜곡되는데...? 저는 그런 해석은 주저하지 않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특히 선불교에서는) "알음알이"를 쓸데 없는 짓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중요하고도 의미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알음알이", 문자, 또는 언어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그것들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지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더 낫다라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행하는 것, 머리로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불법)을 배우고 행해서 부처가 되고자 하는 종교임에 분명합니다. 달마 스님은 부처님의 훌륭한 제자이고 큰 스승일 뿐이지 불교의 교조가 아닙니다. 혜능 스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신 두 손 모음 _()_()_()_
2008년 8월 30일 토요일
2008년 8월 29일 금요일
2008년 8월 28일 목요일
문화 경제학...
이번 학기 문화 경제학...
초기 수강신청자 38명이었다.
첫 시간에 나의 주문 사항은 ...
1. 영어로 된 글 읽기 연습을 주로 할 것이다.
2.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일주일에 10시간 이상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결과...
12명 남았다...
아마도 내일이면 더 줄어서 폐강이 될 전망.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경제학 원론 첫 시간부터 줄곧 가르쳐 온 것이
"There is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 (세상에 공짜란 없다)"
이었는데...
초기 수강신청자 38명이었다.
첫 시간에 나의 주문 사항은 ...
1. 영어로 된 글 읽기 연습을 주로 할 것이다.
2.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일주일에 10시간 이상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결과...
12명 남았다...
아마도 내일이면 더 줄어서 폐강이 될 전망.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경제학 원론 첫 시간부터 줄곧 가르쳐 온 것이
"There is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 (세상에 공짜란 없다)"
이었는데...
2008년 8월 8일 금요일
권위라는 환상
우리가 어떤 말의 내용이나 주장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려울 때면 대부분 그 말을 한 사람의 권위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다. 뭐 내가 곰곰히 생각해 봐야 어차피 판단하기 어려울 경우나 또는 곰곰히 생각해 보기가 귀찮으면 그 권위라는 것에 의존하면 편하니까 그 속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부처님께사는 이 점을 항상 경계하라고 가르치신다. 맹신은 백해무익일 뿐이다.
그러면 그 권위라는 것은 대체 어디서 오는가? 또는 그 권위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까
1. 언론 매체
보수주의자들은 조중동에 실린 글들은 무조건 믿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진보주의자들은 조중동에 실린 글들은 무조건 믿지 않고, 한겨레나 오마이뉴스의 기사면 무조건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결과는...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거나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면 너무도 뻔한 것들에 대해서도 거의 백팔십도 다른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이는 신념이나 이념과도 관계가 있다.
2. 이념, 신앙
기독교식 논리와 불교식 논리. 좌파적 주장과 우파적 주장. 이 부분은 "한 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 아무리 이야기하고 설득을 하려고 도무지 씨알이 먹혀 들지를 않는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성경책에 이렇게 씌였다라고 하면 불자들은 무조건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신념이나 이념은 아편보다 더 무섭다고 했던가?
3. 말하는 사람의 학벌, 지위, ... 등등
경제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이성모 원장님이 하면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시큰둥, 정기문이 하면 "음..." 하면서 고개를 끄떡끄떡. 꼭 같은 이야기를 유창희 거사가 하면 시큰둥, 조계사 주지 스님이 하면 "역시..." 하면서 합장.
4. 말하는 사람의 지명도
5. 용어
일반적으로 어려운 용어, 한자어, 영어, 외국어 등을 많이 섞어 쓰면 권위있는 걸로 착각한다.
6. 말하는 사람의 나와의 거리
이 부분이 참 재미있다. 우리 학교 전기공학과 교수가 겪은 에피소드 하나. 집에서 부인에게 전기에 관한 이야기를 어쩌다 하게 되었는데, ... 그 부인 왈 "여보, 텔레비전에서는 그렇게 얘기 안 하던데...?" 이 부인은 남편보다 그 텔레비전에 더 권위를 부여한 것이다. 자기 남편은 전기공학 박사인데도 말이다. 그 부인에게는 그가 전기공학 박사가 아니라 밤낮으로 시원찮은 남편일 뿐이다.
그러면 그 권위라는 것은 대체 어디서 오는가? 또는 그 권위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까
1. 언론 매체
보수주의자들은 조중동에 실린 글들은 무조건 믿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진보주의자들은 조중동에 실린 글들은 무조건 믿지 않고, 한겨레나 오마이뉴스의 기사면 무조건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결과는...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거나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면 너무도 뻔한 것들에 대해서도 거의 백팔십도 다른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이는 신념이나 이념과도 관계가 있다.
2. 이념, 신앙
기독교식 논리와 불교식 논리. 좌파적 주장과 우파적 주장. 이 부분은 "한 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 아무리 이야기하고 설득을 하려고 도무지 씨알이 먹혀 들지를 않는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성경책에 이렇게 씌였다라고 하면 불자들은 무조건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신념이나 이념은 아편보다 더 무섭다고 했던가?
3. 말하는 사람의 학벌, 지위, ... 등등
경제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이성모 원장님이 하면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시큰둥, 정기문이 하면 "음..." 하면서 고개를 끄떡끄떡. 꼭 같은 이야기를 유창희 거사가 하면 시큰둥, 조계사 주지 스님이 하면 "역시..." 하면서 합장.
4. 말하는 사람의 지명도
5. 용어
일반적으로 어려운 용어, 한자어, 영어, 외국어 등을 많이 섞어 쓰면 권위있는 걸로 착각한다.
6. 말하는 사람의 나와의 거리
이 부분이 참 재미있다. 우리 학교 전기공학과 교수가 겪은 에피소드 하나. 집에서 부인에게 전기에 관한 이야기를 어쩌다 하게 되었는데, ... 그 부인 왈 "여보, 텔레비전에서는 그렇게 얘기 안 하던데...?" 이 부인은 남편보다 그 텔레비전에 더 권위를 부여한 것이다. 자기 남편은 전기공학 박사인데도 말이다. 그 부인에게는 그가 전기공학 박사가 아니라 밤낮으로 시원찮은 남편일 뿐이다.
2008년 7월 31일 목요일
욕보다 더 무서운...
다른 사람들이 나한테 욕을 하거나 빈정거릴 때, 그런 소리를 듣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넘기기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가끔 있기는 한가 봅니다. (가뭄에 콩 나듯이 ...) 그런 분들을 우리는 거의 군자, 또는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마도 만 명에 한 명쯤 있을까 말까...?
그런데 그런 분들 100명을 모아 놓고... 칭찬을 좀 해 줬더니... 100명 모두가 흔들리더랍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출 수 있게 만든다지요? 그래서 칭천을 바로 욕보다 더 무서운 바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정치권에서든 어디서든... 듣기에는 좋지 않은, 그러나 바른 말을 해 주는 사람은 다 멀리 하고... 듣기에 달콤한 말만 해 주는 사람들만 옆에 두려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인가 봅니다. 결국, 간신들만 살아 남고... 충신들은 쫓겨 나고...
지금 우리 이명박 대통령 옆에도 그런 칭찬 잘 하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닌지...? 요새 나라 사정이 너무 답답합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런데 그런 분들 100명을 모아 놓고... 칭찬을 좀 해 줬더니... 100명 모두가 흔들리더랍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출 수 있게 만든다지요? 그래서 칭천을 바로 욕보다 더 무서운 바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정치권에서든 어디서든... 듣기에는 좋지 않은, 그러나 바른 말을 해 주는 사람은 다 멀리 하고... 듣기에 달콤한 말만 해 주는 사람들만 옆에 두려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인가 봅니다. 결국, 간신들만 살아 남고... 충신들은 쫓겨 나고...
지금 우리 이명박 대통령 옆에도 그런 칭찬 잘 하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닌지...? 요새 나라 사정이 너무 답답합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2008년 7월 30일 수요일
자율 또는 자유 의지
세상는 자세히 살펴 보면 재미있는 일들이 많다.
어떤 현상 또는 우리의 행동들이 나 스스로 하는가 아니면 타의에 의해서 움직이는가에 따라 다르게 불려진다. 또는 그 원인이나 동기가 무엇인가에 따라서도 같은 현상들을 다르게 일컫기도 한다.
우리가 스스로 적게 쓰면 검소하다고 하고, 타의에 의해 적게 쓰면 가난이라고 한다.
스스로 자기를 낮추면 겸손하다고 하고, 타의에 의해 자기를 낮추면 비굴하다고 한다.
일을 해 주고 스스로 돈을 받지 않으면 자원봉사, 돈을 받아야 하는데 받지 못하면 강제 노동.
아무것도 주고받지 않고 성관계를 맺으면 사랑을 나눈 것이고, 돈을 주고 받으면 매매춘이 된다.
남녀가 합쳐야 성관계 이루어지는데, 돈을 주는 쪽은 즐기는 것이고, 돈을 받는 쪽은 몸을 판다고 한다. (사실은 영혼 까지도...)
돈을 주고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면 놀이가 되는데, 돈을 받고 노래하면 노동이 된다.
나이트에 가서 돈주고 춤을 추면 놀이가 되고, 돈을 받고 춤을 추면 노동이 된다.
돈을 주고 술을 마시면 놀이가 되지만, 돈을 받고 술을 마시면 역시 노동이다. (술상무?)
돈 십만원 줄테니 봉정암까지 가서 무언가 전해 주는 심부름좀 하라고 하면 대부분 거절을 하지만 (일이라고 생각 되니까),
스스로 고생고생 하면서 봉정암까지 아무것도 받지 않고 기어 오른다 (놀이라고 생각하니까).
스스로 세상을 위해 목숨을 버리면 순교라고 하고, 타의에 의해 버려지면 살해되었다고 한다.
스스로 재물을 남에게 주면 보시가 되는데, 타의에 의해 주게 되면 강탈 당한 것이 된다.
이처럼 같은 현상이지만 자발성 또는 자유의지에 기초할 때 만이 진정하게 가치 있는 일임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역시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이어야 하고, 내 행복은 내 마음 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들 법문에는 "주인공"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가 보다.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나 다른 애완동물들은 오로지 주인에게 잘 보이려고 애교를 떤다. 그래야 밥도 많이 주고, 맛있는 것도 많이 주니까... 그래서 그렇게 살면 개같은 인생(음... 견생이라고 해야 하나...?)이 될 것이리라.
우리는 혹시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행동하는 적이 없을까?
그래서 나는 없고 남의 눈에 비치는 내 껍데기를 위해 살지는 않는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화장을 하고 예쁜 옷 입고,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부 잘 하고,
직장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일 열심히 일하고,
친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억지 웃음을 웃고,
힘있는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부하고,
하느님 또는 부처님께 잘 보이기 위해 보시하고,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착한 일 하고,
내신성적 때문에 봉사활동 하고,
............
기문의 횡수 _()_()_()_
어떤 현상 또는 우리의 행동들이 나 스스로 하는가 아니면 타의에 의해서 움직이는가에 따라 다르게 불려진다. 또는 그 원인이나 동기가 무엇인가에 따라서도 같은 현상들을 다르게 일컫기도 한다.
우리가 스스로 적게 쓰면 검소하다고 하고, 타의에 의해 적게 쓰면 가난이라고 한다.
스스로 자기를 낮추면 겸손하다고 하고, 타의에 의해 자기를 낮추면 비굴하다고 한다.
일을 해 주고 스스로 돈을 받지 않으면 자원봉사, 돈을 받아야 하는데 받지 못하면 강제 노동.
아무것도 주고받지 않고 성관계를 맺으면 사랑을 나눈 것이고, 돈을 주고 받으면 매매춘이 된다.
남녀가 합쳐야 성관계 이루어지는데, 돈을 주는 쪽은 즐기는 것이고, 돈을 받는 쪽은 몸을 판다고 한다. (사실은 영혼 까지도...)
돈을 주고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면 놀이가 되는데, 돈을 받고 노래하면 노동이 된다.
나이트에 가서 돈주고 춤을 추면 놀이가 되고, 돈을 받고 춤을 추면 노동이 된다.
돈을 주고 술을 마시면 놀이가 되지만, 돈을 받고 술을 마시면 역시 노동이다. (술상무?)
돈 십만원 줄테니 봉정암까지 가서 무언가 전해 주는 심부름좀 하라고 하면 대부분 거절을 하지만 (일이라고 생각 되니까),
스스로 고생고생 하면서 봉정암까지 아무것도 받지 않고 기어 오른다 (놀이라고 생각하니까).
스스로 세상을 위해 목숨을 버리면 순교라고 하고, 타의에 의해 버려지면 살해되었다고 한다.
스스로 재물을 남에게 주면 보시가 되는데, 타의에 의해 주게 되면 강탈 당한 것이 된다.
이처럼 같은 현상이지만 자발성 또는 자유의지에 기초할 때 만이 진정하게 가치 있는 일임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역시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이어야 하고, 내 행복은 내 마음 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들 법문에는 "주인공"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가 보다.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나 다른 애완동물들은 오로지 주인에게 잘 보이려고 애교를 떤다. 그래야 밥도 많이 주고, 맛있는 것도 많이 주니까... 그래서 그렇게 살면 개같은 인생(음... 견생이라고 해야 하나...?)이 될 것이리라.
우리는 혹시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행동하는 적이 없을까?
그래서 나는 없고 남의 눈에 비치는 내 껍데기를 위해 살지는 않는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화장을 하고 예쁜 옷 입고,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부 잘 하고,
직장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일 열심히 일하고,
친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억지 웃음을 웃고,
힘있는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부하고,
하느님 또는 부처님께 잘 보이기 위해 보시하고,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착한 일 하고,
내신성적 때문에 봉사활동 하고,
............
기문의 횡수 _()_()_()_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이런 사람이 어떻게 서울 시장이 되었을까?
이런 걸 두고 맛이 갔다고 하던가...?
****************************************************
<서울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서>
흐르는 역사 속에서 서울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하심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거룩한 도시이며,
서울의 시민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서울의 교회와 기독인들은
수도 서울을 지키는 영적 파수꾼임을 선포하며,
서울의 회복과 부흥을 꿈꾸고 기도하는
서울 기독 청년들의 마음과 정성을 담아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합니다.
2004년 5월 31일
서울특별시장 이명박 장로 외
서울의 부흥을 꿈꾸며 기도하는 서울 기독청년 일동
이런 걸 두고 맛이 갔다고 하던가...?
****************************************************
<서울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서>
흐르는 역사 속에서 서울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하심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거룩한 도시이며,
서울의 시민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서울의 교회와 기독인들은
수도 서울을 지키는 영적 파수꾼임을 선포하며,
서울의 회복과 부흥을 꿈꾸고 기도하는
서울 기독 청년들의 마음과 정성을 담아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합니다.
2004년 5월 31일
서울특별시장 이명박 장로 외
서울의 부흥을 꿈꾸며 기도하는 서울 기독청년 일동
첫 경험 (퍼온글)
첫 경험
나는 오늘 처음으로 경험했다
작은 방에서
내 마음 속의 그 분께 모든 걸 드렸다.
가슴 뛰는 설레임과
처음이란 두려움으로 맞이한
첫 경험...
그러나 모든 게 끝난 지금
아무 생각도 나질 않는다
이런 게 어른이 된다는 걸까?
부끄러움에
수줍게 뒤를 돌아 보니
하얀 색 위에 선명한
빨간 흔적...
내가 실수 한 건 아닐까?
그러나 후회하진 않아
내가 선택한 것이니까
내 맘을 가져 간 그분을 탓하진 않아
친구들은 스무살 때 경험했다던데 뭐
내 나이 이제 스물 하나
그래...
난 이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야
그러나...
그러나...
자꾸 밀려드는 이 허무함은 무얼까?
아아...
투표란 이런 것인가?
나는 오늘 처음으로 경험했다
작은 방에서
내 마음 속의 그 분께 모든 걸 드렸다.
가슴 뛰는 설레임과
처음이란 두려움으로 맞이한
첫 경험...
그러나 모든 게 끝난 지금
아무 생각도 나질 않는다
이런 게 어른이 된다는 걸까?
부끄러움에
수줍게 뒤를 돌아 보니
하얀 색 위에 선명한
빨간 흔적...
내가 실수 한 건 아닐까?
그러나 후회하진 않아
내가 선택한 것이니까
내 맘을 가져 간 그분을 탓하진 않아
친구들은 스무살 때 경험했다던데 뭐
내 나이 이제 스물 하나
그래...
난 이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야
그러나...
그러나...
자꾸 밀려드는 이 허무함은 무얼까?
아아...
투표란 이런 것인가?
모든 권위는 존중되어야 한다
모든 권위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대통령, 국회, 선관위, 검찰, 헌법재판소, ...
모두 그 권위가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대통령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리이지 그 대통령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노무현이든 안노무현이든... 또는 김무현이든...
대통령의 권위가 인정되듯이 국회의 권위도 인정되어야 합니다. 만일 탄핵소추 제도가 불합리하다면 헌법을 먼저 고쳐서 대통령 탄핵제도를 없애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헌법에 있는 제도를 무시하고 촛불 들고 군중들이 결정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헌법재판소의 권위와 그 결정은 어떤 경우에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만일 헌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개헌을 해서 헌법재판소를 없애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헌재를 두고 촛불 든 군중들이 판단하겠다고 하면 안됩니다.
이런 결정이 나면 존중하고, 저런 결정이 나면 항거하겠다는 생각... 바로 인민 재판입니다. (요줌 분위기로 봐서는 만일 헌재에서 탄핵안이 가결되면 이제는 촛불이 아니라 횃불 집회로 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니. 시민 폭동으로 유도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헌법재판소는 왜 있어야 합니까? "이런 결정이 나면 받아들이고, 저런 결정이 나면 횃불집회로 응징하겠다?" -- 이건 민주주의도 아니고 개혁도 아니고, 헌법을 수호하는 것도 아니고, XX도 아닙니다.
촛불 집회가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영향을 (사실은 위협을) 줄 이유도 없고 그럴 의도는 전혀 없다구요? 정말 논리적 모순입니다. 영향을 주지 않으려면 촛불집회를 왜 합니까? 방송과 정치권에서는 왜 촛불 집회를 선동합니까? 더구나 김용옥 같은 사람은 학생들에게 촛불 들고 길거리 나가지 않는다고 야단칩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영향을 줄 생각이 전혀 없다구요? 누가 그 말을 믿겠습니까?
앞으로 모든 법원 앞에서 매일 군중들이 와서 데모할까 두렵습니다. 법원과 판사는 왜 존재합니까? 법원의 권위와 결정은 어떤 경우에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판사들의 판단을 믿지 못하겠다면, 헌법을 바꿔서 판사와 법원을 없애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군중들이 인민재판으로 판결을 하면 됩니다.
노사모가 있으면 반노사모 또는 노미모(노무현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모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미모도 존중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노무현은 그냥 노무현입니다. 지금은 그냥 대한민국 대통령이구요. 대한민국 대통령은 탄핵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노무현은 "경애하는... 어쩌고 저쩌고 ... 수령"이 아닙니다. 그냥 대한민국 대통령일 뿐입니다. 탄핵소추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그런 대통령일 뿐입니다. 탄핵소추의 발의는 국회가 하도록 되어 있고, 그 최종 판단은 헌법재판소에서 하도록 헌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 권위와 책임, 권한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만일 이 제도가 불합리한 것이라면, 헌법을 개정해서 국회의 탄핵소추 발의권을 없애고, 헌법재판소를 없애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법치주의입니다.
193명의 국회의원들... 그 중에 부패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 대한민국 국민들은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국회의원들이 부패했다고 해서 국회의원으로서 할 일을 못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나쁜 짓 약간 했다고 해서 (경선자금, 대선자금, 측근비리, 말장난, ... 등등) 군중이 촛불 들고 모여서 대통령의 할 일을 못 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은 선거를 통해서입니다. 선거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는 위급한 상황이라면 적절한 절차(국회의 탄핵소추)를 거쳐서 권한을 정지시키면 됩니다. 그리고 헌법재판소가 판단하면 됩니다. 그것이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의 권한에 대한 견제 수단입니다. 절대로 군중들이 촛불 들고 문화행사라는 이름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국회의원들을 믿을 수가 없다구요? 그러면 국회의 기능을 정지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런 국회의원을 솎아 내면 됩니다. 검찰을 통해서.... 선거를 통해서.... 그래도 국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개헌을 해서 국회라는 걸 없애 버리면 됩니다. 그리고 군중이 국회의 임무를 대신하면 됩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의 권위가-노무현의 권위가 아닌-존중되는 사회, 그리고 모든 헌법기관의 권위가 존중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존중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개인(특히 정치인)에 대한 숭배는 정말로 위험합니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혹시나 "위대하시고 우리 민중을 사랑하시는 경애하는 어쩌고 저쩌고... 노무현 대통령" 이 탄생되지 말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04. 3. 29. 정기문
대통령, 국회, 선관위, 검찰, 헌법재판소, ...
모두 그 권위가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대통령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리이지 그 대통령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노무현이든 안노무현이든... 또는 김무현이든...
대통령의 권위가 인정되듯이 국회의 권위도 인정되어야 합니다. 만일 탄핵소추 제도가 불합리하다면 헌법을 먼저 고쳐서 대통령 탄핵제도를 없애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헌법에 있는 제도를 무시하고 촛불 들고 군중들이 결정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헌법재판소의 권위와 그 결정은 어떤 경우에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만일 헌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개헌을 해서 헌법재판소를 없애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헌재를 두고 촛불 든 군중들이 판단하겠다고 하면 안됩니다.
이런 결정이 나면 존중하고, 저런 결정이 나면 항거하겠다는 생각... 바로 인민 재판입니다. (요줌 분위기로 봐서는 만일 헌재에서 탄핵안이 가결되면 이제는 촛불이 아니라 횃불 집회로 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니. 시민 폭동으로 유도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헌법재판소는 왜 있어야 합니까? "이런 결정이 나면 받아들이고, 저런 결정이 나면 횃불집회로 응징하겠다?" -- 이건 민주주의도 아니고 개혁도 아니고, 헌법을 수호하는 것도 아니고, XX도 아닙니다.
촛불 집회가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영향을 (사실은 위협을) 줄 이유도 없고 그럴 의도는 전혀 없다구요? 정말 논리적 모순입니다. 영향을 주지 않으려면 촛불집회를 왜 합니까? 방송과 정치권에서는 왜 촛불 집회를 선동합니까? 더구나 김용옥 같은 사람은 학생들에게 촛불 들고 길거리 나가지 않는다고 야단칩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영향을 줄 생각이 전혀 없다구요? 누가 그 말을 믿겠습니까?
앞으로 모든 법원 앞에서 매일 군중들이 와서 데모할까 두렵습니다. 법원과 판사는 왜 존재합니까? 법원의 권위와 결정은 어떤 경우에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판사들의 판단을 믿지 못하겠다면, 헌법을 바꿔서 판사와 법원을 없애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군중들이 인민재판으로 판결을 하면 됩니다.
노사모가 있으면 반노사모 또는 노미모(노무현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모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미모도 존중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노무현은 그냥 노무현입니다. 지금은 그냥 대한민국 대통령이구요. 대한민국 대통령은 탄핵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노무현은 "경애하는... 어쩌고 저쩌고 ... 수령"이 아닙니다. 그냥 대한민국 대통령일 뿐입니다. 탄핵소추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그런 대통령일 뿐입니다. 탄핵소추의 발의는 국회가 하도록 되어 있고, 그 최종 판단은 헌법재판소에서 하도록 헌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 권위와 책임, 권한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만일 이 제도가 불합리한 것이라면, 헌법을 개정해서 국회의 탄핵소추 발의권을 없애고, 헌법재판소를 없애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법치주의입니다.
193명의 국회의원들... 그 중에 부패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 대한민국 국민들은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국회의원들이 부패했다고 해서 국회의원으로서 할 일을 못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나쁜 짓 약간 했다고 해서 (경선자금, 대선자금, 측근비리, 말장난, ... 등등) 군중이 촛불 들고 모여서 대통령의 할 일을 못 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은 선거를 통해서입니다. 선거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는 위급한 상황이라면 적절한 절차(국회의 탄핵소추)를 거쳐서 권한을 정지시키면 됩니다. 그리고 헌법재판소가 판단하면 됩니다. 그것이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의 권한에 대한 견제 수단입니다. 절대로 군중들이 촛불 들고 문화행사라는 이름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국회의원들을 믿을 수가 없다구요? 그러면 국회의 기능을 정지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런 국회의원을 솎아 내면 됩니다. 검찰을 통해서.... 선거를 통해서.... 그래도 국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개헌을 해서 국회라는 걸 없애 버리면 됩니다. 그리고 군중이 국회의 임무를 대신하면 됩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의 권위가-노무현의 권위가 아닌-존중되는 사회, 그리고 모든 헌법기관의 권위가 존중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존중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개인(특히 정치인)에 대한 숭배는 정말로 위험합니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혹시나 "위대하시고 우리 민중을 사랑하시는 경애하는 어쩌고 저쩌고... 노무현 대통령" 이 탄생되지 말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04. 3. 29. 정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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